항목 ID | GC047003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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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辛未洋擾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상태 |
[정의]
1871년 미국이 조선에 침범함으로써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까지 영향을 미친 사건.
[역사적 배경]
신미양요 는 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 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과의 통상 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무력 침략한 사건이다.
[경과]
주청 전권 공사 F. F. 로우(F. F. Law)가 전권을 위임받고, 조선 원정을 명령받은 아시아 함대 사령관 J. 로저스(J. Rodgers)는 군함 5척, 함재 대포 85문, 해군과 육전 대원 총 1,230명을 이끌고 1871년 5월 16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 항을 출발하였다. 19일 남양만(南陽灣)[경기도 화성시 남양면 서안에 있는 좁고 긴 만]에 도착한 미군은 뱃길을 탐사하면서 북상, 물치도(勿淄島)[인천광역시 동구 만석동 작약도(芍藥島)의 조선 시대 이름]를 자국 함대의 정박지로 정하였다. 미군은 조선에 탐측 승낙을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6월 1일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 해협 수로의 측량과 정찰을 목적으로 두 척의 군함을 파견하였다. 이에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은 미군의 불법 영해 침범을 경고하고 즉시 철수를 요구하였다.
미군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광성보(廣城堡)[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진보(鎭堡)]으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경고용 포격을 가하였고 미군은 일단 물러났다. 미군은 조선군의 경고용 사격을 빌미로 오히려 조선 정부에 사과와 손해 배상을 요구하였고, 6월 10일 군함 2척을 앞세우고 육상 전투 대원 644명을 강화도의 초지진(草芝鎭)[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설치된 진(鎭)]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이어 덕진진(德津鎭)[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진], 광성보(廣城堡)[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진보]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그러나 6월 11일의 광성진 전투에서 미군 역시 피해가 많아 이튿날 물치도로 철수하였다.
[결과]
미국의 아시아 함대는 조선에서 아무런 성과 없이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 대원군은 서울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