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10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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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臣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집필자 | 김상열 |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출신이거나 연고를 둔 자로서 국가와 왕을 위해 충성을 바친 사람.
[개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문학산 주변에서 고인돌을 중심으로 한 청동기 시대 유적과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 시대까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와 연고를 갖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 박약하여 충신을 살펴보기 어렵다. 다만, 『인천부 읍지(仁川府 邑誌)』, 『여지 도서(輿地圖書)』 등의 읍지(邑誌) 및 지지(地誌)에는 이사주(李師朱), 이상재(李尙載), 석성군(石城君) 오련(吳連) 등 3인을 충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내용]
이사주는 『인조실록(仁祖實錄)』에 “이중로(李重老)․이성부(李聖符)․박영신(朴榮臣)․윤정준(尹廷俊)․이사주(李師朱)․권호연(權浩然) 등에게 증직(贈職)하고, 박영신․윤정준에게 장사지낼 물품을 하사하였다. 기탄(岐灘)의 싸움에서 이중로 등은 힘껏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고, 윤정준․박영신은 잡혔으나 굴복하지 않고 분개하여 역적 이괄(李适)을 욕하다가 난자당하여 몸에 온전한 살갗이 없었다.”라고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인조 때 이괄의 난과 관련한 충신으로 여겨진다. 읍지에는 정려가 있었으나 무너졌고, 금천(金川)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상재[1607~1636]는 병자호란에 참모로 참전하여 전사한 인물이다. 본관은 부평(富平), 자는 문거(文擧)이며 군수 이덕일(李德一)의 아들이며, 문양 부원군(文陽府院君) 유자신(柳自新)의 외손자가 된다. 1630년(인조 8)에 진사가 되고, 1633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에 등용되어 저작에 올랐다. 1636년 금정 도찰방(金井道察訪)이 되었다. 이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鄭世䂓)의 종사관으로 출정하여 인조가 피난한 남한산성을 향하여 진군하다가 경기도 용인에서 적의 협공을 받아 전사하였다.
오련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는데, 호성공신(毫聖功臣)의 교서를 반급할 때의 별교서(別敎書)에는 “오련․이희령(李希齡)은 3등에 책훈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품계와 관작을 한 자급(資級) 초천(超遷)[직위 등의 등급을 뛰어 넘음]한다. 그들의 부모와 처자도 한 자급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가계(加階)[가계를 올림]하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석성군의 ‘석성’은 충청남도 석성인데 봉작 시 작호는 대체로 본관을 중심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