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018
한자 千年- 歷史- 風流- 鄕校- 書院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정석태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에 있는 조선시대의 향교와 서원.

[역대 향교 설립과 밀양향교]

향교(鄕校)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유학을 교육하고 공자와 사성십철(四聖十哲), 송나라와 우리나라 역대 유현(儒賢)을 제향(祭享)하기 위해 국가가 지방에 설립한 교육 기관이다.

처음에는 사당 대성전(大成殿)에 공자 이하 역대 성현의 화상(畫像)을 모셨다가, 1320년 원나라 국자감의 제도를 본받아 화상을 소상(塑像)으로 바꾸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한양 성균관의 대성전에는 위패(位牌)를 봉안하였지만, 지방 향교 대성전에는 고려의 유제(遺制)가 그대로 남아 여전히 소상을 봉안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김종직(金宗直)이 1455년 성주향교 대성전을 알묘(謁廟)하고 「알부자묘부(謁夫子廟賦)」를 지어 밤나무 신주로 바꾸어 봉안할 것을 권한 이후 전국 향교 대성전에서 소상 대신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다.

고려는 도성에 국학(國學)을 두고, 지방 주요 고을에 향학(鄕學)을 두어 교육하였다. 1003년 3경 10목에 설치한 향학은 우리나라 향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1127년 인종이 조서를 내려 지방의 주에 학교를 설립하고, 군현에도 학교를 설립하게 한 것이 우리나라 향교의 출발이 된다. 경상남도 밀양의 향교도 이때 처음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 사실은 1170년경 경상남도 밀양에 온 임춘(林椿)의 시에 ‘향교’라는 말이 언급된 것을 통해 확인이 된다.

조선은 건국 후 숭유 억불(崇儒 抑佛)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유학 교육을 특히 중시하였다. 전국 모든 고을에 향교를 설립하여 유학을 교육하였고, 공자 이하 역대 선현을 제향하면서 지역민을 교화해 나갔다. 그리고 학전(學田) 등 향교를 유지·운영할 재정을 확보하여 주는 한편, 교육을 전담할 관인으로 도호부 이상 큰 고을에는 문과 급제자로서 종6품 교수를 중앙에서 파견하고, 그 이하 작은 고을에는 종9품 훈도를 두었다.

조선 초기 경상남도 밀양에는 고려 중기 이래 존속하였던 향교를 토대로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용지리밀양향교가 설립되었다. 임진왜란으로 건물이 모두 소실되자 경상남도 밀양시 교동의 현 자리에 향교를 옮겨 건립하였다. 밀양향교는 도호부에 걸맞은 규모의 건물과 넉넉한 재정을 갖추고 지역민을 교육하는 한편, 향약(鄕約) 시행을 통하여 지역민을 교화하는 기관으로 발전하였다. 이처럼 밀양향교가 발전하는 데는 지역 출신 김종직의 힘이 크다. 김종직은 밀양의 유향소(留鄕所) 부활과 향약 시행을 추진하는 한편, 향교 교육에도 적극 관여하였다.

김종직은 1482년 밀양향교 제생(諸生)들에게 보낸 서찰에서 “재(齋)라고 하는 것은 심신을 검속한다는 것이고, 명륜(明倫)이라고 하는 것은 인륜을 밝힌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생들은 동재와 서재에 기거하면서 재계하는 마음으로 공경히 사당에 모신 공자 이하 성현들을 본받아서 자신의 덕성을 닦고, 명륜당에 올라 인륜을 밝혀 세상에 교화를 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향교가 바로 “성현을 목표로 덕성을 닦아 세상에 인륜을 펴 나가는” 성리학 교육과 교화의 본산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밀양향교김종직의 이와 같은 학문과 정신이 드높은 성리학 교육과 교화의 중심지로서 많은 인재를 육성하여 지역 문풍을 진작하는 데 크게 기여를 하였다.

[조선 전기 서원 창설과 밀양의 서원]

서원(書院)은 성리학 연구와 교육 및 지역 출신 유현을 제향하기 위하여 사림이 지방에 설립한 교육 기관이다.

조선은 초기에 국가 주도의 향교 설립을 통하여 지방 문교의 진흥을 꾀하였지만, 이후 계속적인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다 교육 내용이 과거 시험을 대비하는 것에 그쳐 사림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어려웠다. 서원은 향교의 이와 같은 문제점을 극복하려고 지역 사림이 주동이 되어 만든 교육 기관이다. 1543년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소수서원(紹修書院)]을 처음 창건하고, 그 후 이황(李滉)이 서원 창건을 적극 추진한 결과, 156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여러 서원이 설립되었다.

서원은 지역 사림이 주체가 되어 설립한다는 측면에서 사설이지만, 국가 공인의 사액 서원(賜額書院)이 되면 국가의 지원과 관리를 받는다는 측면에서 관립 향교에 준하는 교육 기관이 된다. 특히 초기 창건을 주도한 이황에 의하여 서원은 “성인을 목표로 덕성을 닦는 성리학의 본산인 동시에 지역민의 교육과 교화를 행하는 기관”으로 설립·운영해야 한다는 취지가 천명되고 실천되면서, 향교가 교육과 교화의 기관으로서의 기능이 약화되어 갈 때 향교를 대신하여 지역민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한 곳으로 많이 출현하게 되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이 대표적인 예이다.

경상남도 밀양에 서원이 처음 설립된 것은 1567년의 일이다. 부사 이경우(李慶祐)와 지역 사림이 이황의 자문을 받아 경상남도 밀양시 활성동영원사(瑩原寺) 터덕성서원(德城書院)을 창건한 것이 그것이다. 덕성서원김종직을 독향(獨享)하였고, 지역 출신 안수관(安守寬)의 요청으로 이황이 친필로 써 준 ‘점필서원(佔畢書院)’이라는 네 글자를 편액으로 걸었다. 덕성서원은 서원 창건 초기 설립된 29개 서원 중 하나로서 전국에서 명성이 높은 서원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버려진 것을 지역 사림이 복원하였지만 외진 곳에 위치하여, 1634년 밀양시 상남면 예림리로 이건해서 예림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박한주(朴漢柱)신계성(申季誠)을 배향한 다음, 1669년 ‘예림서원’으로 사액이 되었다. 그 뒤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예림서원은 사액 서원으로서 밀양향교와 함께 밀양 지역민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였다. 밀양향교는 교육과 교화의 기관으로서 기능이 약화되면서, 성현에 대한 제향 기관이자 지역 사림의 자치 기구로 변해갔다. 나아가 지역 사림 간의 갈등으로 남인계 인사들이 예림서원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게 되면서 밀양향교를 대신하여 지역민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는 기관이 되었다. 예림서원은 1871년 훼철되었다가 뒤에 복원되었다.

밀양에는 예림서원 외에 사액 서원으로 표충서원(表忠書院)이 더 있다. 1610년 표충사(表忠祠)로 창건되어, 1669년 사액이 되었다. 1839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의 현재 자리로 옮긴 뒤 표충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871년 훼철되고 뒤에 복원하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 밀양에는 삼강서원(三江書院), 남계서원(南溪書院), 혜산서원(惠山書院), 백곡서원(栢谷書院), 모례서원(慕禮書院), 칠탄서원(七灘書院), 오봉서원(五峯書院), 용안서원(龍安書院), 신남서원(莘南書院), 덕남서원(德南書院), 광천서원(廣川書院), 용산서원(龍山書院) 등이 창건되었다. 1868년 모두 훼철되었고, 그중 삼강서원, 혜산서원, 오봉서원, 신남서원, 덕남서원 등은 뒤에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밀양향교의 어제와 오늘]

밀양향교는 조선 건국 이후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용지리에 설립되었다. 초기에 부사 정수홍(鄭守弘)이 대성전·명륜당(明倫堂)·동무(東廡)·서무(西廡)·동재(東齋)·서재(西齋) 등을 전면 중수하였고, 그 뒤 계속 중수와 증축이 이루어져 경주향교·진주향교와 함께 영남 3대 향교로 일컬어졌다. 『밀주지(密州誌)』 등의 기록에 의하면 밀양향교는 대성전 3칸, 명륜당 5칸, 동무와 서무 각 3칸, 동재와 서재 각 2칸, 신문(神門)·제기고(祭器庫)·제복고(制服庫)·개복청(改服廳)·신주(神廚)·대문(大門) 등 건물 외에도 독서루(讀書樓)·소루(小樓)·교아(敎衙)·자미정(紫薇亭) 등 부속 건물을 갖춘 매우 큰 규모여서 한때 액내(額內)·액외(額外) 교생(校生)[유생(儒生)] 등 600여 명을 수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1567년 지역 출신 조광익(曺光益)의 요청으로 이황이 쓴 대성전과 명륜당의 편액 글씨를 내걸면서 도학의 요람으로 발전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읍성과 함께 소실되었다.

1602년 부사 최기(崔沂)가 경상남도 밀양시 교동 옥교산(玉轎山) 중턱으로 자리를 옮겨 대성전 3칸을 세우고, 공자 이하 사성(四聖)[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십철(十哲)[민손(閔損), 염경(冉耕), 염옹(冉雍), 재여(宰予), 단목사(端木賜), 염구(冉求), 중유(仲由), 언언(言偃), 복상(卜商), 전손사(顓孫師)]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614년 성진선(成晉善)이 동무와 서무 3칸을 세우고 송조사현(宋朝四賢)[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주희(朱熹)]과 동방구현(東方九賢)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또한 신문 3칸, 제기고·제복고, 신주 3칸, 대문 3칸, 개복청을 세워 알묘와 제향을 위한 시설을 갖추었다. 1617년 대성전의 들보가 꺾여 내려앉아 해체 중수하였다. 1618년 부사 이홍사(李弘嗣)가 명륜당 5칸을 대성전 좌측에 세우고, 동재와 서재를 각각 5칸씩 세움으로써 교육 시설을 완비하여 향교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이때 명륜당 남쪽 풍화루(風化樓) 3칸도 함께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때 밀양향교는 교육을 담당하기 위하여 중앙에서 파견하던 교수와 부사에 의하여 임명되던 비관인 학장(學長)이 폐지되었다. 대신 부사가 향교를 명목상으로 관장하게 되면서, 교육기관으로서 기능을 많이 상실한 채 성현에 대한 제향기관이자 지역 사림의 자치기구로 변모하였다. 밀양향교의 인적 구성은 교임(校任)으로 도유사(都有司) 1인, 장의(掌議) 2인, 재유사(齋有司) 2인 등이었고, 교생은 임진왜란 이후 60여 명에서 1734년 70명으로 증원된 것이 확인된다.

1821년 부사 이현시(李玄始)가 허물어져 가는 대성전을 명륜당 우측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명륜당과 그 부속 건물을 보수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경상남도 밀양 지역 내 사림 간의 갈등이 계속되면서 교육 기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나아가 남인계 인사들이 예림서원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게 되면서, 지역민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던 본연의 기능을 예림서원에 거의 넘겨주게 되었다. 1881년 부사 오장묵(吳章黙)이 풍화루를 중수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과거 제도가 폐지되고 신교육 제도가 시행되면서, 밀양향교는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이 폐지되고 춘추석전(春秋釋奠)을 지내는 제향 기관으로 남게 되었다. 1904년 군수 조종서(趙鍾緖)가 낡고 허물어진 명륜당을 해체 중수하고, 향교 경내를 정비하였다.

1910년 망국 이후 일제강점기밀양향교는 전래의 인적 조직과 재정 기반을 모두 상실하였다. 일제는 밀양향교의 관리와 운영에 대한 모든 권한을 지역 유림에게서 박탈하여 밀양군수에게 귀속시켰다. 그리고 도유사와 장의 등 전래의 직제를 모두 없애고, 대신 밀양향교에 수직하면서 관의 지휘를 받아 문묘를 중심으로 향교를 관리하는 직원(直員) 1인을 두었다.

1945년 해방 이후 1947년 성균관에 의한 지방 향교 직제 개편에 따라 종래의 직원을 전교(典校)로 하여 향교를 대표하게 하고, 각 면마다 1인씩 장의를 뽑아 향교 운영을 관리하게 하였다. 1949년 성균관에서 열린 전국 유림 대회에서 향교 대성전 위패 봉안 범위와 석전 의식의 규범이 정해졌다. 공자와 사성을 중심으로 송나라 2현과 우리나라 18현을 동무와 서무에서 정전으로 올려 종향하고, 석전 의식도 공자 탄신일에 한 번 지내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 뒤 몇 차례의 변경을 거쳐 2022년 현재는 춘추 2회 석전을 행하고 있다. 이후 여러 차례 정부 보조와 지역 유림의 성금으로 향교 건물의 보수와 경내 정비 작업이 이루어졌다.

밀양향교는 지금도 규모와 짜임새 및 아름다움에서 경주향교, 진주향교와 함께 영남의 3대 향교로 손꼽힌다. 밀양향교는 평지에 세운 경주향교처럼 전묘후학(前廟後學)의 건물 배치 방식도 취하지 못하였고, 산지에 설립한 진주향교처럼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건물 배치 방식도 취하지 못하였다. 새로 터 잡은 곳이 옥교산 중턱 가파른 곳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좌묘우학(左廟右學)으로 건물을 배치하였다가, 1821년 부사 이현시가 옮겨 지으면서 우묘좌학(右廟左學)으로 건물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대성전이 명륜당보다 다소 높이 있도록 위계를 지운 다음, 담장을 둘러 제향 영역과 강학 영역을 구분하였다.

밀양향교는 이처럼 옥교산 중턱 가파른 곳에 자리 잡게 되면서, 바로 아래 교동마을을 두고도 세속과 절연된 공간을 연출한다. 지금은 풍화루 아래 좌측에 교동마을에서 밀양향교로 곧바로 올라오는 길을 냈지만 원래 없었던 것으로 원래는 풍화루 아래 우측에 정문을 내고 교동마을을 끼고 올라오도록 길을 내어 바로 아래 교동마을과 별개의 구역으로 완벽하게 차단하였다. 풍화루는 밀양향교의 누문(樓門)으로서 선비들이 학문을 익히는 여가에 휴식하는 공간이면서, 내외의 시선을 차단하여 안쪽 명륜당과 대성전을 더욱 깊고 그윽한 곳으로 만들어 준다. 밀양향교 대성전밀양향교 명륜당은 조선 후기 향교 건축물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되어 2021년 12월 29일 각각 보물 제2094호와 보물 제2095호로 지정되었다.

[예림서원 연혁과 당재 명호의 의미]

1) 예림서원 연혁

1567년 부사 이경우와 지역 사림이 이황의 자문을 받아 경상남도 밀양시 활성동 자씨산 기슭 옛 영원사 터에 창건하였다. 김종직을 독향한 다음 이름을 덕성서원으로 하였고, 지역 출신 안수관의 요청으로 이황이 친필로 써 준 ‘점필서원’이라는 네 글자를 편액으로 걸었다. 1606년 임진왜란으로 황폐화된 것을 지역 사림이 복원하였다. 이때 신계성의 배향이 추진되었다. 1634년 부사 이유달(李惟達)이 지역 사림의 여론을 채택하여 서원의 이건(移建)과 박한주·신계성의 배향 문제를 장현광(張顯光)에게 문의한 다음, 1635년에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예림리 운례(運禮)에 터를 잡고 공사하던 중 교체되었고, 후임 부사 이필달(李必達)이 나머지 공사를 하여 준공하였다.

1637년에 원호를 예림서원으로 고치고, 사림의 공의로 김종직의 위패를 봉안하는 한편, 박한주를 동쪽에 배향하고, 신계성을 서쪽에 배향하였다. 1652년 부사 김응조(金應祖)가 강당을 세웠다. 1669년 ‘예림(禮林)’이라는 이름으로 사액되고, 1670년에 예조정랑 강복선(姜復善)이 파견되어 게액(揭額)하고 치제(致祭)하였다. 1678년 강당이 소실되고, 1680년 사우가 소실되었다. 부사 조헌경(曺憲卿)의 장계와 예조의 계청으로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종남산(終南山) 기슭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고, 제액(題額)을 하사받았다. 사우는 ‘육덕사(育德祠)’, 내삼문은 ‘정양문(正陽門)’, 강당은 ‘구영당(求盈堂)’, 동재는 ‘돈선재(敦善齋)’, 서재는 ‘직방재(直方齋)’, 문루는 ‘독서루(讀書樓)’, 주고와 제수청은 ‘전사청(典祀廳)’, 동몽들의 숙사는 ‘몽양재(蒙養齋)’로 편액하고, 경상감사를 파견해 게액하였다.

1832년 이후 버려져 향사조차 드리지 못하였다. 1848년 부사 정윤용(鄭允容)이 사우를 중수하면서 다시 향사를 드리게 되었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874년 사림이 강당을 복구하고 예림재(禮林齋)로 개편하였다. 1921년 사우 유지에다 설단(設壇)하고 다시 향사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1928년 서재가 건립되었다. 1971년 정부 보조로 강당을 중수하였고, 1974년에는 육덕사와 정양문이 복원되었다. 1981년 정부 보조로 강당과 서재가 중수되었다. 1985년부터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하여 1987년 완공되었다. 경내 건물로는 3칸의 육덕사, 6칸의 강당, 각 3칸의 돈선재와 직방재, 2칸의 전사청, 양몽재·독서루·장판고·고직사 등이 있다. 1974년 2월 16일 예림서원이라는 명칭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되었으며, 2018년 12월 20일에 예림서원에서 밀양 예림서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 후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2) 예림서원 사우 및 당재 명호(堂齋 名號)의 의미

(1) 육덕사(育德祠): 서원 사우이다. 육덕은 『주역(周易)』 「몽괘(蒙卦)」의 “산하출천 몽 군자 이 과행육덕(山下出泉 蒙 君子 以 果行育德)[산 아래에서 샘물이 솟아나는 것이 몽괘의 상이다. 군자는 이 상을 보고 물처럼 과감하게 행하고, 산처럼 든든한 덕을 기른다]”이라는 말에서 취한 것이다.

(2) 구영당(求盈堂): 서원 강당이다. 구영은 이황이 「화도집음주(和陶集飮酒)[도연명의 음주 시에 화운하다]」라는 시에서 “구도영기정(求道盈其庭)[도를 찾는 인물이 문하에 가득하네]”라고 한 말에서 취한 것이다. 서원이 김종직을 주향(主享)으로 한 곳임을 기념하는 한편, 그 삶을 본받아서 학문을 가르치고 학문을 익혀야 함을 밝힌 것이다.

(3) 시민재(時敏齋): 서원 강당 좌측 협실이다. 시민은 『서경(書經)』 「열명하(說命下)」에서 “유학 손지 무시민 궐수내래 윤회우자 도적우궐궁(惟學 遜志 務時敏 厥修乃來 允懷于玆 道積于厥躬)[배울 때는 뜻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 힘써서 항상 민첩하게 하면 그 수양이 이루어지리니, 이를 마음 깊이 새겨 두면 도가 그 몸에 쌓일 것이다]”이라고 한 말에서 취한 것이다.

(4) 일신재(日新齋): 서원 강당 우측 협실이다. 일신은 『대학(大學)』에서 인용한 은나라 탕(湯)임금의 반명(盤銘)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날로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한다]”이라는 말에서 취한 것이다.

(5) 돈선재(敦善齋): 서원 동재이다. 돈선은 돈본선속(敦本善俗)의 줄임말로서 근본을 도탑게 하고 풍속을 선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조임도(趙任道)가 「우졸자박선생여표비명(迂拙子朴先生閭表碑銘)」에서 박한주가 창녕현감으로서 지역 선비들의 교육에 특히 힘쓴 사실을 기려 “수기치인돈본선속지도(修己治人敦本善俗之道)[자신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며 근본을 도탑게 하고 풍속을 선하게 하는 도]”를 강론하였다고 한 말에서 취한 것이다. 동벽(東壁)으로 배향된 박한주를 기념하는 한편, 강학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6) 직방재(直方齋) : 서원 서재이다. 직방은 『주역』 「곤괘(坤卦)」의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경으로 안을 바르게 하고, 의로 밖을 방정하게 한다]”라는 말에서 취한 것이다. 조식(曺植)에 의하여 ‘한평생 경(敬)과 의(義) 두 가지를 지표로 학덕을 닦아 성인 공자에게 가까이 다가선 사람’으로 높여진 신계성을 기린 것이다. 서벽(西壁)으로 배향된 신계성을 기념하여 ‘경의재(敬義齋)’로 붙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이미 조식을 배향한 산청(山淸) 덕천서원(新山書院)의 강당을 ‘경의당(敬義堂)’으로 명명하였기에 중복을 피하느라 같은 의미의 직방으로 이름을 달리한 것이다. 조식의 경의 철학이 신계성에게서 유래하였음을 밝히는 한편, 학문을 닦는 선비들이 신계성처럼 경의를 지표로 학문을 닦아 나가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7) 몽양재(蒙養齋): 동몽재(童蒙齋)이다. ‘몽양’은 『주역』 「몽괘(蒙卦)」의 “몽이양정 성공야(蒙以養正 聖功也)[어렸을 때 바르게 교육됨이 성인의 공부이다]”라고 한 말에서 취한 것이다.

예림서원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뒤쪽 종남산 기슭 널찍한 곳에 터를 잡았다. 지세가 자연적으로 몇 단의 층이 져 있고, 그 끝은 산비탈로 이어져 있다. 따라서 전학후묘의 형태로 건물을 배치하면서 상하가 위계가 지도록 하는 데 적지이다. 제일 아래쪽에 누문 독서루를 두고, 그 뒤에 좌우로 장판각과 몽양재에 두었다. 그리고 축대를 쌓아 위에 강당 구영당과 동재와 서재, 돈선재와 직방재를 앉혔다. 강학 영역을 아래쪽 휴식과 입문의 공간보다 위계를 한 단 높여 놓은 것이다. 강당 구영당 뒤로 조금 멀리 산비탈에 사당을 높이 두고 다소 가파른 계단으로 오르게 한 다음, 사방을 담장으로 둘렀다. 제향 영역의 사당을 같은 서원 경내라도 다른 곳보다 높고 격절(隔絕)된 곳에 두어 숙연한 마음으로 우러르게 한 것이다.

[밀양향교와 예림서원의 현대적 활용 가능성]

밀양향교예림서원은 조선 성리학의 역사와 조선 선비의 절의 정신, 의리 정신이 아직도 온전하게 살아 있는 곳이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통하여 선조들의 지혜와 정신을 배워 볼 수 있다. 특히 밀양향교는 그 아래에 한옥이 줄지어 있는 교동마을이 함께 있어서 교육과 관광 자원으로 적극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앞으로 밀양향교예림서원에 깃든 선조들의 지혜와 정신을 배워 볼 수 있는 좋은 콘텐츠를 많이 개발하여 문화 도시로서 밀양에 걸맞는 문화유산으로 적극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와 함께 주변의 무분별한 개발이나 새로운 건물을 짓는 등 더 이상 원형을 훼손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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