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0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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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連山縣 |
영어음역 | Yeonsan-hye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조선 전기와 중기 충청남도 논산시 일원에 설치되었던 행정구역.
[관련기록]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여도비지(輿圖備志)』, 『대동지지(大東地志)』, 『호서읍지(湖西邑誌)』 등의 옛 지리지나 읍지 등에 기록되어 있다. 각 지리지 읍지들은 형식과 방식에 차이를 보이고는 있으나 연혁을 시작으로 호구, 군정, 성씨, 전답, 토의, 토공, 약재, 토산, 성곽, 역원, 불우, 인물, 관원, 형승, 산천, 학교, 사묘, 고적, 열녀, 제영 등 여러 항목에서 연산현의 자세한 상황들을 기록하고 있다.
[내용]
연산현은 현 충청남도 논산시 일부를 구성하는 5개 면을 포괄하는 지역의 옛 고을명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연산현의 구역을 동쪽으로 진산(珍山)까지 21리, 서쪽으로 은진(恩津)까지 18리, 남쪽으로 고산(高山)까지 10리, 북쪽으로 진잠(鎭岑)까지 15리로 기록하고 있다.
연산현은 신라와 백제가 황산벌 전투를 벌인 지역이자 계백의 묘가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의하면 신라는 이 일대에 거사물정(居斯勿停)을 설치하여 군사적인 요충지로 삼았고, 후에 거사물현으로 변화하여 연산의 속현으로 병합되기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 연산현의 주요 역할과 관련되는 내용은 옛 연산현 지역이었던 연산면에 남아 있는 연산아문과 연산현 관아지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변천]
연산현은 백제가 관할했던 삼국시대에는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 또는 황등야군으로 불렸으며, 신라의 삼국 통일 후인 757년(경덕왕 16)에 황산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연산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018년(현종 9년) 공주 임내에 병합되기도 했다. 조선 전기인 1413년(태종 13)에는 연산현이 되었으나 1646년(인조 24) 유탁 등이 연산·이산(尼山)·은진(恩津) 세 고을에서 봉기하였다가 붙들려 처형되는 일이 발생하고 이 일로 세 고을은 하나로 합쳐져 은산(恩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후 1656년(효종 7)에 다시 복귀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공주부 연산군이 되었다가 1896년 충청남도 연산군으로 변경되면서 군내(郡內), 식한(食汗), 내적(內赤), 외성(外城), 부인처(夫人處), 적사곡(赤寺谷), 두마(豆磨), 벌곡(伐谷)의 9개 면을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연산군이 폐지됨과 동시에 논산군의 연산, 부적, 양촌, 벌곡, 두마의 5개 면으로 재편되었다.
[의의와 평가]
연산현은 그 지명을 통해 각 시기별 논산시의 역사의 일부를 고증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