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0981 |
---|---|
한자 | 尹文擧墓所 |
영어의미역 | Grave of Yun Munge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 갈산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성진 |
성격 | 묘소 |
---|---|
건립시기/일시 | 1781년 |
관련인물 | 윤문거 |
소유지 주소 |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 갈산리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 갈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윤문거의 묘소.
[개설]
윤문거는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자는 여망(汝望)이며 호는 석호(石湖)이다. 아버지는 대사간 윤황(尹煌)이며,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성혼의 딸이다.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과 교유하였으며, 조익(趙翼), 김상헌(金尙憲) 등에게도 배웠다.
1630년(인조 8)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33년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주서로 관직에 나아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간원정언으로 척화의(斥和議)를 진계(陳啓)하였고, 그 해 12월 청나라가 침입하자 부친과 함께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가(扈駕)하였다. 1639년 부친상을 당하여 벼슬을 그만둔 후에 효종의 부름에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 『근사록(近思錄)』과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등을 가까이 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또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해서를 잘 썼다. 사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연산(連山)의 구산서원(龜山書院),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석성(石城)의 봉호서원(蓬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석호유고』 3권이 있다.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위치]
윤문거 묘소는 광석면 갈산리 산정말 뒷산의 동향 사면에 있다.
[형태]
윤문거 묘소에는 동자석·묘비·상돌 등이 배치되어 있고, 봉분 주위로 판석이 둘러져 있다. 묘비는 지붕[옥개]형 이수를 올린 형태로, 비신의 높이는 122㎝이고, 너비는 56㎝이며, 두께는 26㎝이다. 글자의 크기는 앞면은 8㎝이고, 음기는 2.1㎝이다. 재질은 오석이다. 묘소 앞에 팔작지붕 모양의 지붕돌[가첨석]을 갖추었다.
[금석문]
묘비는 윤증이 찬(撰)하고, 윤동섬이 서(書)했으며, 윤광소가 전서(篆書)를 썼는데, 앞면에는 “유명조선국이조참판증의정부좌찬성충경공석호윤선생지묘정부인증정경부인평창이씨부좌(有明朝鮮國吏曹參判贈議政府左贊成忠敬公石湖尹先生之墓貞夫人贈貞敬夫人平昌李氏祔左)”라고 쓰여 있으며, 음기는 다음과 같다.
“유명조선국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세자좌부빈객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세자이사지경연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성균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시충경석호윤선생묘표음기
선생의 성은 윤씨요, 이름은 문거이며 자는 여망이다. 아버지는 황이니 관은 대사간이요 호는 팔송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창녕성씨로 우계 선생 혼의 따님이다. 선생은 만력 병오년에 낳았다. 어려서 심성이 침착하고 조용하며 온유하고 온화하여 보는 이들이 옥인이라 칭송했다. 숭정 경오년에 생원에 급제하고, 계유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원에 뽑혔으나 굳이 피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주서, 설서를 거쳐 정원에 올랐으니 때는 병자년 가을이었다.
화의를 논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상소하여 예조·병조좌랑으로 옮기고, 곧 겨울에 왕의 대가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조정의 의논이 척화신을 잡아 보내서 오랑캐를 사례하고자 하였는데, 팔송 부군이 스스로 분발하여 가기를 청함에 선생이 상소해서 자신이 대신 가기를 빌었는데, 마침 구원하는 자가 있어 모두 면할 수 있었다. 상이 환도하여 다시 병조좌랑이 되고 정언·수찬·교리를 이어 내렸으나 사양하였다. 무인년에 순검사종사로 삼남주사로 나아갔다.
기묘년에 팔송 부군의 상사를 당하여 시묘살이를 3년 하고 복을 마치고 금산의 협곡에 우거할 때, 수찬으로 부름이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계미년에 제천현감에 부임하고 을유년에 버리고 돌아왔다. 병술에 황지의 변이 있었는데 선생이 먼저 알고 사람을 시켜서 관에 고하여 잡아 섬멸한 공으로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랐으나 사양하였으나 면치 못했다. 무자년에 성부인의 상사를 당해서 시묘살이를 먼저 상사와 같이 하고 복을 마치고 나서 승지에 다시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동래부사에 제수되었을 때에 왜구의 침범이 평상시와 달라서 안팎이 걱정하고 위태롭게 여겼다.
선생이 서울로 올라가 임명에 사례하고 부임해서 바로 학교를 수선하고 병사와 백성을 어루만지고 충렬사를 새로이 단장하고 은연중에 조세를 감면하는 계획을 세웠다. 얼마 후에 간악한 무리들의 모함이 있어 국문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하였다가 다시 시골 군수로 돌아왔다. 당초에 백강 이공 경여가 청렴하고 깨끗하고 절개를 지키고 정숙함을 들어서 선생을 천거하여 특별히 제수하는 하명을 받아서, 승지 호·형·공조참의와 경주부윤을 연속해 배수하였는데 모두 사양하였다.
갑오년에 이조참의를 배수하니, 선생은 사직의 소를 올려 대략 아뢰기를 ‘신의 돌아간 아버지인 아무개가 조정에 있으면서 정묘에서부터 정축에 이르기까지 시종 한가지로 의를 잡아, 지하에 들어가기까지도 화치 못했다. 신은 진실로 어리석어서 망령되이 아버지의 이론을 인습해서 이제 혹 조정이 어려움을 만나서, 나로 하여금 중국사신으로 가게 하였으니, 이 일에 임하여 구차하게 피하는 것은, 분수나 의리상 감히 할 수 없어, 마땅한 것을 따르고자 하면 아비의 도를 어기는 것이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다시 지하에서 죽은 아비를 뵈올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신이 스스로 폐하기를 마음속에 달갑게 해 돌이킬 줄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하니 효종이 너그러이 용납하여 대사간을 체직하여 제수했지만 또 사직했다. 이 해 겨울 질병을 얻어 경기의 집에서 호남으로 호송되어 돌아왔다. 이로부터 한결같이 병으로 사직했으나 대사간·이조참의·대사성·부제학을 연하여 배수하고 또 내의원에 명하여 약물을 내려주었다.
기해년에 효종이 승하함에 선생이 수레를 타고 입경하여 궐문 밖에서 곡했다. 현종이 그 자리에 사관을 보내어 위로하고 대사헌에 승진해 배수하니, 선생이 감당치 못하고 삼소로 사직하였으나 번갈아 상이 힘써 만류하고 근면하심이 지극하여 감히 곧바로 돌아올 수 없었다. 명년 경자년에 나라 상사를 지내고, 상소를 올려 물러 날 것을 빌었으나 허락되지 않아서 드디어 상소를 남기고 돌아오니, 이후로 다시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대사헌을 배수한 것이 열다섯 번이요, 대사간이 세 번이요, 이조참판이 다섯 번이요 사이에 동지경연 세자빈객으로 불렀다.
또 이어서 특별한 유지를 내려서 부르고 혹 말로 권했으나 선생은 매번 절하고 상소해서 사양하고 사례하였다. 임자년 월 28일에 선조묘의 아래에 있는 제실에서 돌아갔다. 부음이 전해지자 특별히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장례의 제수와 성묘의 일을 도울 역부를 내려주셨다. 계축 2월에 니산현의 남쪽 갈산 갑향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북으로 팔송 부군의 산소와 십 리쯤 멀리 떨어져 있다. 조상 세계와 선조의 덕은 신도비에 갖추어 실려 있다.
선생은 자품이 독실하고 가정에서 가르침을 받아서 오로지 안에 마음을 쓴 까닭으로 스스로 마음에 지녀 써 몸에 행하고 물에 접함에 이른 것은 한결같이 참된 정성으로 해서 한 터럭의 외식의 뜻이 없었다. 신독하고 수약한 공은 늙어도 게으르지 않았으며, 덕이 높을수록 예가 더욱 공손하고 몸은 더욱 낮음에 도는 더욱 높아 빛이 밖으로 발해 가히 가릴 수 없었다. 덕행과 도량이 천연스럽게 이루어져 응증하고 과묵하여 사람들이 바라보고 두려워하였다.
어진 마음은 측은하고 성한 듯하고 평소에는 물러나고 사양해서 끊고 끊어 다른 것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마음속에는 양의 강한 것이 쌓여 있어서 발하는 데 의심나고 어려움이 없었으며, 고요하면서도 움직이는 것을 제어하며, 밝고도 위엄이 있어서 일은 대소가 없이 만남에 패연하였다. 효도하고 우애하고 충신하고 정직하고 청검한 것은 이에 선생의 행실이었다. 마음의 헤아림이 넓고 넓어 비록 덕이 몸이 쌓이고 재주가 물에 두루하였으나 자랑스레 기쁜 얼굴빛이 일찍이 없었다.
착함을 좋아하고 의를 즐겨해서 오직 날마다 부지런히 하였으나 복식과 거처 봉신의 물건과 명리의 사사로움과 문사의 뜻과 총욕의 이름에 이르러서는 모두 담박하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팔송 부군의 상사를 마친 후로부터 다시 당세의 뜻이 있지 않았고 중간에 제천과 동래에 두 차례 간 것은 대개 다만 의가 있었기 때문인데, 효종 말년에 반드시 조야를 굳세게 일으키고자 하여 실로 공이 돕기를 바랐다. 선생이 마침내 나가지 않았으나 나라를 걱정하는 일념은 먹고 쉴 적에도 잊지 않았으며, 시국을 근심하고 풍속을 병되이 여기고 하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불쌍히 여겨 때에 따라서는 밤새도록 자지 않았으니 이것은 또 선생의 덕행이 몸에 있으면서도 사업이 펴지고 경륜해서 채워 기름이 도가 있었다.
수가 백세에도 이르지 못하고 앞에는 근심만 있고 뒤에는 즐거움이 없이 겸양으로 몸을 마쳤으니 하나는 시국에 매이고 하나는 명에 있었으니 오호라. 슬프도다. 정부인 평창이씨는 선교랑 연의 따님이요 이조판서 익평공 계남의 6세손이다. 성품이 단정하고 안화해서 부모를 섬김에 효하고 시부모 섬김에 정성스럽고 남편 섬김에 공경하며 인척을 대함에 순히 하고 사랑하고, 자녀를 기름에 사랑하고 가르치고 제사를 삼가며 길쌈에 부지런히 하여 규방 안에서의 행실이 모두 법칙에 맞았다. 정미에 나서 열일곱에 선생에게 시집와서 선생보다 20일 앞서 죽으니 함께 무덤하여 장사지냈다.
3남 5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박이니 지극한 행실이 있었는데 불행히 외임을 맡아 나간 지 1년을 넘기고 죽었다. 차남 원은 조졸하고 막내는 윤이다. 큰딸은 별좌 이순악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현감 최세경에게 가고 다음은 별좌 이에게 가고 다음은 사인 심해에게 가고 막내는 유명흥에게 시집갔다. 박이 두 아들이 있는데 은교·주교이고 두 딸은 모두 어리다. 윤의 한 딸은 사위가 이의화이다. 외손 남녀는 20여인이다.
선생이 죽은 지 6년 정사에 윤이 묘 앞에 돌을 세우고 증으로 하여금 그 뒤에 지를 하게 하니 오호라. 선생은 나타나지 않은 덕이 있고 불운한 공이 있으니 벼슬아치들이 그 의를 복종하고 선비들이 그 교화를 말해서 종족 향당에 이르기까지 사랑하며 공경치 않음이 없었으니 비록 백세의 후라도 반드시 장차 풍을 듣고 사모함이 쇄하지 않을 것이니 소자 어찌 감히 그 사이에 한 말씀을 두리오. 삼가 눈을 흘리며 그 경계를 기록하여 후인으로 하여금 선생의 산소가 여기 있음을 알게 하노라. 종자 증은 삼가 쓰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유생들이 팔송 선생의 노강원우에다 선생을 추배하고 숙종이 사액을 명하고 제를 이루게 하고 명종 병자에 선생의 척화의 절개를 추장해서 특별히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에 추승하고 시호를 충경이라 했으며, 또 제를 내렸으니 높이 보답하는 은전이 갖추었다. 윤은 벼슬이 현감인데 후사가 없어서 족자 만교를 취하여 뒤를 삼았다. 은교도 후사가 없어 종자 동일을 취하여 뒤를 삼았으나 또 후사가 없어 조카 광수를 취하여 뒤를 삼았으며, 관이 봉사인데 후사가 없어서 종자 최기를 취하여 뒤를 삼았다. 주교는 아들이 다섯이니 장남은 동일, 차남은 동질인데 벼슬 해서 수로첨추요, 삼남은 동실, 사남은 동필, 막내는 동밀인데, 실과 밀은 조졸하였다. 동질이 네 아들이 있으니 광수·사·염·낙이다. 사의 아들은 충경·기경인데 조촐하고 염의 아들은 최와 무기요. 낙의 아들은 ?기요. 필의 아들은 광·규·유·원이요. 원의 아들은 이·면·임·지기인데 이는 규의 후계가 되고 면은 유의 후계가 되었다. 만교의 아들은 동좌·간좌와 광순·준·식·영이요. 순의 아들은 무과현감 예기와 진사 영기요. 준의 아들은 선기요. 식의 아들은 원기요. 간의 아들은 광첨인데 특이한 자질이 있었으나 조졸하고 둘째 아들은 광엄이다. 충의 아들은 항·정·진이다. 선생이 몰한 지 백여 년에 비로소 돌에다 새겨 감히 원문에 미처 기재하지 못했던 것을 기록한다/ 족현손 병조판서 광소는 삼가 기록한다/ 숭정 기원후 3신축 윤달 여름에 족증손 이조판서 동섬이 삼가 쓰다(有明朝鮮國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 經筵春秋館成均館事世子左副賓客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禮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諡忠敬石湖尹先生墓表陰記
先生姓尹氏諱文擧字汝望考諱煌官大司諫號八松妣貞夫人昌寧成氏牛溪先生諱渾之女先生以萬曆丙午生幼沈靜溫潤見者稱玉人 崇禎庚午中生員癸酉登第被翰苑薦固避不就由注書設書陞正言時丙子秋也 啓論和議之非移禮兵曹佐郞冬扈駕入南漢山城 廟議欲執送斥和臣以謝虜八松府君自奮請行先生上疏乞以身代適有救者得俱免 上還都復兵郞連拜正言修撰校理辭戊寅以巡檢使從事接行南舟師己卯丁八松府君憂廬墓三年服闋卜居于錦山峽中以修撰 召不赴癸未赴堤川縣監乙酉棄官丙戌有潢池之變先生先知之使人告官捕殄以勞陞通政階辭不免戊子丁成夫人憂廬墓如前喪服闋再除承旨辭除東萊府使時倭寇異常中外憂危先生入京謝 命赴任旣至繕學敎撫兵民新忠烈祠隱然爲保障計未幾爲奸究所搖就勘奪職先生仍復還鄕守初白江李公敬輿以廉潔守靜薦先生 命持敍連拜承旨戶刑工曹參議慶州府尹皆辭甲午拜吏曹參議先生上疏辭略曰臣父故臣某在 朝自丁卯至丁丑終始執乎一義至入地而不化臣誠愚駿妄襲父論今或値 朝廷乏使擬臣於燕价則臨事苟避分義不敢欲遂承當違父道將何面目復見亡父於地下此臣所以甘心自廢而不知反者也 孝宗優容之遞拜大司諫又辭是冬忽得末疾自畿莊舁歸湖自此一以病辭連拜大司諫吏曹參議大司成副提學又 命內局賚以藥物己亥 孝宗昇遐先生自載入京哭于 闕門外 顯宗嗣遣士官慰諭陞拜大司憲先生不敢當三疏辭遞以 上勉留勤至不敢征歸明年庚子過國練上疏乞骸不 許遂留疏而歸此後不動矣拜大憲者十五大諫者三吏曹參判者五間以同知 經筵 世子賓客 召又連降別諭召之或乞言焉先生每拜疏辭謝壬子月二十八日考終于先墓下齋舍訃 聞特贈吏曹判書給喪祭需及助墓役夫以癸丑二月葬于尼山縣南葛山甲向之原北距八松府君墓十里而遙世系先德具載其神道之碑焉先生資禀篤實而受訓家庭專用心於內故自存諸中以至行於身而接於物者一以眞誠爲無一毫外假之意愼獨守約之功老而匪懈德愈崇而禮愈恭身益卑而道益尊輝光發外有不可掩者德器天成凝重寘黙人望而畏之仁心懇惻藹如也平居退讓若斷斷無他而中蘊陽剛發無疑難靜而制動明而有威事無大小遇之沛然孝友忠信正直淸儉乃先生之行也心量洪曠雖德積於己才周於物而未嘗有矜喜色好善樂義惟日孶孶至於服食居處奉身之物與夫名利之私文詞之末龍辱之至者擧泊然不以爲意自八松府君喪畢之後無復有當世之志中間有堤川東蕃二行則盖而有義也 孝宗末年必欲强起之朝野實以公輔之望而先生意不出然憂國一念食息不忘愍時病俗畏天悲人有時通昔不寐此又先生行止之大致也噫先生德行在躬而業展經綸充養有道而壽未躋期頤有先憂無後樂而冲挹以終身一係於時一存乎命鳴呼痛哉貞夫人平昌李氏宣敎郞瑑之女吏曹判書翼平公季男之易世孫也性端正安和事父母孝事舅姑誠事君子敬處族姻順以愛養子女慈以敎愼於祭祀勤於蠶績閫內之行悉合則生於丁未十七歸于先生先先生二十日卒同塋而葬三男五女男長曰搏有至行不幸外除逾年繼歿次援夭季掄女長適李舜岳坐次崔世慶縣監次別坐李顒次士人沈楷季兪命興搏有二子曰殷敎周敎二女皆幼掄一女壻曰李宜華外孫男女二十餘人先生卒六年丁巳掄竪石墓前使拯識于其陰鳴呼先生有不顯之德有不運之功搢紳服其義章甫誦其化以至宗族鄕黨莫不愛而敬之雖百世之後必將聞風而宗慕之不襄矣小子何敢置一辭於其間謹泣記其挭槩俾後人知先生衣冠之葬在是云 從子拯謹述
先生卒後章甫追配先生于八松先生魯岡宇 肅廟命賜額致祭 英宗丙子追獎先生斥和節特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諡忠敬又 賜祭崇報之典備矣掄官縣監無嗣取族子晩敎爲後殷敎無嗣取從子東一爲後又無嗣取從子光洙爲後官奉事無嗣取從子最基爲後周敎五子長東一次東質莁仕壽僉樞東實東苾東密實與密夭東質有四子光洙泗濂洛泗子忠憼基憼夭濂子最懋基洛子基苾子光圭瑬瑗瑗子彛冕任摯基彛爲圭後冕爲瑬後晩敎子東佐侃佐光淳浚湜泳淳子芮基武縣監榮基進士浚子善基湜子二侃子光瞻有異質夭次光儼忠子恒鼎鎭先生歿百有餘年始克刻石敢記原文所未載云/ 族玄孫兵曹參判光紹謹識/ 族曾孫吏曹判書東暹謹書/ 崇禎紀元後三辛丑閏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