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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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師吉墓所 |
영어의미역 | Grave of Yi Sagil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숫골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성진 |
성격 | 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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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722년 |
소유지 주소 |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숫골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숫골에 있는 조선 후기 함평이씨 논산 입향조 이사길의 묘소.
[개설]
이사길(李師吉, 1639~?)은 부사 이양과 진주강씨 사이에서 1639년(인조 17)에 태어났다. 훗날 청주양씨 양여필(楊汝弼)의 사위로 상월면 주곡리에 들어와 함평이씨 논산 입향조가 되었다. 윤선거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노강서원 건립에 협력하였고, 사산감역을 제수받았다. 아들 이삼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하여 사헌부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형태]
이사길 묘소에는 석주와 석등, 상돌, 묘비, 최근의 묘비 등이 배치되어 있고, 봉분 주위에 판석이 둘러져 있다. 옛 묘비는 지붕[옥개]형 이수를 올린 형태이고, 비의 높이는 148㎝이고, 너비 61.5㎝, 두께 23㎝이다. 앞면에 ‘증가선대부사헌부행사산감역소위장군이공사길지묘증정부인청주양씨부좌(贈嘉善大夫司憲府行四山監役昭威將軍李公師吉之墓 贈貞夫人淸州楊氏祔左)’라고 쓰여 있다.
최근의 비는 방형 대좌 위에 대리석의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형태의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지붕돌은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연목과 부연의 조각이 섬세할 뿐만 아니라 기왓골도 사실적이다. 비신의 규모는 높이 128㎝, 너비 102㎝, 두께 32㎝이다. 전액은 9㎝, 비문은 2.5㎝, 음기는 3㎝이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금석문]
이사길 묘소의 묘비는 전액으로 ‘증대사헌리공묘갈명(贈大司憲李公墓碣銘)’이라 쓰여 있다. 비문에는 “유명조선국증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행사산감역관소위장군 이공묘갈명병서(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行四山監役官昭威將軍李公墓碣銘井序)/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겸영경연사윤증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尹拯撰)/ 통정대부성균관대사성지제교최창대서(通政大夫成均館大司成知製 敎崔昌大書)/ 통정대부사간원대사간지제교이세최전(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知製 敎李世最篆)”에 이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다.
“이군 자정의 이름은 사길이니, 그 선대는 함평인이다. 고려 신무위대장군 언이 시조이고, 조선조에 들어와 장양공 종생이 영광스런 공으로 함성군에 봉했으니, 그의 8대조이다. 증조 인은 사헌부감찰이요, 할아버지 응상은 군수인데 증 함풍군이요, 아버지 양은 부사로서 증 호조판서요, 어머니는 진주강씨이니, 증 병조참판 진소의 따님이다.
군은 숭정 기묘년 5월 23일에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어서 학업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장성하여 처가살이로 노성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나의 선친에게 수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친이 돌아가시니 군도 또한 서울과 시골을 두루 돌아다니며 번민으로 처신하여, 비록 학업으로 이루지는 못했으나, 스승에 대한 추모의 정이 지극하여 평생 의지할 곳으로 삼았다. 노강서원을 설립하였고, 우곡처사 박공 주구가 그 일을 주도하는데, 군이 도와줌에 실로 정성과 힘을 다 하여 성취하였다.
기사년에 우계와 율곡 두 선생의 문묘 배향을 그치게 하는 변을 당하여, 지방의 많은 선비들이 항소를 올리어 무고함을 변호하는 데 우두머리가 되었다. 소장이 비록 관철되지는 못했지만, 선비들의 사기가 이로 말미암아 확장되었다. 군이 나의 형제들과 정의가 골육지친과 같았으며, 나의 제자 서성이 남의 과실을 용서하지 못하여 항상 군의 실수를 대면하여 말하여도 군은 기쁘게 받아들여 조금도 언짢은 기색이 없고, 좇아 교유하기를 더욱 친밀히 하니, 이것이 군의 장점으로, 남들이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또 평소에 남과 사귀는데, 신의를 지키며 유쾌하게 정성껏 하니, 명촌 나현도가 이 때문에 깊이 사귀었다. 경진년에 사산감역을 제수 받았는데, 이는 서파 오공 도일이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군을 천거한 것이다. 3년이 지나, 계미년에 임기가 차서 벼슬자리를 옮겨야 하는데, 6월 11일에 병으로 돌아가니 노성 술골(주곡) 묘좌에 장사지냈다.
군이 세 번 장가들었으니, 양씨와 민씨와 전씨이다. 두 딸을 두니, 장녀는 김고에게, 다음은 윤헌에게 출가하고, 외아들 삼은 무과에 급제하여, 지금은 가선 경상좌병사가 되었고, 서자 송이 있다. 김고의 아들은 최노이요, 사위는 윤온이고, 삼은 외아들 희천이고, 송은 세 아들을 두었다. 군이 돌아간 지 10년, 신묘년에 아들이 귀하게 되어 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으로 증직되었다.
세 분 배위도 모두 정부인으로 봉했다. 삼이 장차 묘갈을 세우려고, 나에게 글을 지어달라고 청하거늘, 내가 늙고 병들어 정신이 혼미하여 능히 못하겠으나, 삼이 어릴 때 나에게 수학하였고, 확고하게 청하기를 비록 두어 줄 나의 글로써 비에 새기려고 함으로, 끝내 사양치 못하고, 드디어 대략 서술하고 명하여 가로되, 학문은 성취하지 못하고 벼슬은 한 번의 임명으로 그쳤어도, 아들이 있어 효도 받고, 영광스러운 증직도 받았도다. 아! 착한 이를 사모함이 평생에 이르러 스승을 높이고, 벗과 친함에 시종, 지성이었도다. 팔십 고령 늙은이가 병든 몸으로, 힘들게 명을 지으니 널리 후세대에 자정(사길)이 있었음을 알리려는 것이다 숭정기원후 재임인 7월 일 세움.
(추기) 선인께서 일찍이 공의 묘갈명을 지었는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숨은 사실 한 가지가 있다. 기사년에 중궁이 왕후의 자리를 물려줌에 대하여, 오공 두인과 박공 태보 등이 간하다가 죽으니, 공이 이어서 상소하는 데 말이 더욱 간절하였다. 비록 후사(승정원)의 저지를 당했으나, 듣는 이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삼이 지금 형조참판겸총융사가 되었고, 희천이 진사에 급제하였으니, 공의 구부러짐이 후일에 펴질 것이다. 삼이 장차 묘비를 세울 때, 행교에게 추기하여 달라고 하기로, 삼가 뒤쪽에 이와 같이 쓰니, 때는 임인년 5월 상순이다. 통정대부호조참의지제교 윤행교 삼가 기술하고, 윤동원이 삼가 쓰다.
(李君子貞諱師吉其先咸平人高麗神武衛大將軍彦爲鼻祖入我 朝莊襄公徒生策勳封咸城君其八代祖也曾祖諱璘司憲府監察祖諱應星郡守 贈咸豊君考諱瀤府使 贈戶曹判書妣晋州姜氏 贈兵曹參判晋昭之女也君以 崇禎己卯五月二十三日生早孤失學及長資居尼山仍受學於吾先君子未幾先君子捐世君亦栖遑京鄕憂冗纏錦竟不能劬書力學以有成就而於師門追慕篤至以爲沒身歸依依地魯岡書院之建也牛谷處士朴公世耈主其事而君實佐之殫竭誠力以底於成當己巳牛栗兩先生文廟輟亭之變一路多士抗章辨誣而君爲之首疏雖未徹士氣以張君與我兄弟情義如骨肉吾弟子恕性不能容人過每面言君失至於辭或迫切而君怡然受之少無忤色從遊益親此爲君之所長而人不可及者也且凡與人交信而有情款明村羅顯道以此深與之庚辰除四山監役西坡吳公道一長西銓所擧也越三年癸未考滿當遷而以六月十一日病卒葬于尼山酒谷負卯之原君凡三娶楊氏閔氏田氏有二女長適金槹次適尹憲一男曰森擢武科今爲嘉善慶尙左兵使又有庶子松金橰男曰最魯女婿曰尹溫森一男希天松三男君沒後十年辛卯以子貴 贈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三配皆封 贈貞夫人森將竪墓碣請余爲文余老病昏塞不能爲而森亦幼從余學固請不己雖數行語必欲得余筆以刻不得終辭遂畧叙而銘之曰 學而無成官止一命 有子克孝膺此榮贈 嗟君慕善乃其平生 隆師親友終始至誠 八十老夫强疾題銘 庶使後世知有子貞 崇禎紀元後再壬寅七月 日立
先人曾銘公墓有軼事一焉己巳 中宮遜位吳公斗寅朴公泰輔等諫而死公/ 繼之陳疏辭益愷切雖見遏於喉司聞者奇之森今爲刑曹參判兼摠戌使希天/ 成進士名公之屈可伸於後矣森將堅墓石俾行敎追記謹書于下方如此時壬/ 寅五月上澣也/ 通政大夫戶曹參議知製 敎尹行敎謹記 坡平尹東源 敬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