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0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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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民俗 |
영어공식명칭 | Folklore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집필자 | 김도현 |
[정의]
강원도 삼척 지역에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간의 전승 지식과 생활 습속.
[개설]
강원도 삼척 지역의 민속은 지역 내에서 다수가 향유하고 있는 보편화된 전통 문화로, 민중들이 자연·역사·사회 환경에 대처하고 적응하는 지혜와 믿음으로 엮어낸 생활 양식이다. 삼척의 민속 가운데 삼척 시민들의 생활 양식과 세계관 및 미의식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으로는 민간 신앙, 놀이, 구비 문학, 의식주, 생산민속, 세시풍속, 사회민속, 민간요법 등을 들 수 있다.
[마을신앙]
삼척 지역 마을신앙을 마을에서 모시는 상당신(上堂神)을 기준으로 천제당형(天祭堂型), 산신당형(山神堂型), 서낭당형, 해서낭당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천제당형 마을신앙에서 모시는 신령은 천신만 모시는 예, 천신과 산신을 함께 모시는 예, 천신과 기타 여러 신령을 함께 모시는 예로 나눌 수 있다.
천신만 모시는 예는 주로 산 중턱에 돌담을 말굽형으로 둘러 제단을 설치한 사례, 산 정상이나 그 아래에 제단을 설치한 사례, 하천 옆에 임시로 설치한 제단 등이 있다. 이들 제당은 주로 마을에서 상당의 기능을 하거나, 비가 안 올 경우 기우(祈雨)를 위한 제당 기능을 한다. 천제당에 천신과 함께 산신을 모신 사례도 있다. 이곳에서 모신 산신은 주로 제당이 위치한 주산의 산신령을 천신과 함께 모시고 있다. 이들 제당에서의 치제는 비록 매년 지내지는 않더라도 1년 또는 그 이상의 주기를 설정하여 정기로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천제당에서 천신과 함께 여러 신령을 모심으로써 다양한 종교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하려는 마을도 있다. 이들 제당에서 함께 모셔지는 신령은 주로 성황신, 토지신, 여역신, 용왕신이다. 이들 신령 가운데 천신을 능가하는 신령은 없다. 모신 신령들은 마을 내에서 요구되는 역할을 실제 수행하는 신령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천제당형 마을신앙을 제의 구조에 따라 구분하면 천제, 천제-성황제, 성황제-거리제[천신 위함], 천제-성황제-수부신 위함, 천제-용왕제, 천제-성황제-용왕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비정기로 행해지는 천제는 대부분 천제만을 지내어서 기원하는 바를 이루려 한다. 이에 비하여 마을 내의 제당이나 다른 신령과 관련을 맺고 있는 천제는 대부분 정기 신앙 행위가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마을의 여건을 반영한 제의(祭儀) 형태가 형성되고 유지된다.
산신당형 마을신앙을 제의 구조에 따라 구분하면 산신제, 산신제-성황제-수부신 위함, 산신제-서낭제, 산신과 서낭, 수부 등을 함께 위하는 형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마을에서 상당으로 여기는 산신당에서는 마을 서낭당과 연계하여 ‘산신제-서낭제’, ‘산신제-성황제-수부신 위함’의 제의 형태가 나타난다. 산신제만 지내는 마을과 산신당을 마을제당으로 여기는 마을에서의 제의는 산신만을 위하는 의례를 행한다.
이와 달리 산신과 함께 다른 신령들을 모신 마을이나 산신이 그 명칭을 바꾸어 서낭신으로 좌정한 마을에서는 ‘산신제[서낭제]’ 또는 ‘산신제[서낭제]→수부신 위함’ 제의 형태가 주로 나타난다. 그리고 제의 진행 과정은 대부분 엄숙한 유교식으로 진행된다.
서낭당형 마을신앙은 대부분 마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제의 진행 과정은 마을마다 다양하게 나타나고, 진행 과정에서 추구하는 기능이나 의미 또한 마을마다 다르다. 그러나 전체 흐름은 ‘부정치기-진설과 헌작, 재배-독축-소지-수부신과 객귀 물림-음복’ 순으로 진행된다. 물론 이와 같은 과정 이외에 하위 제차로 거리고사나 용왕제 등을 지내면 제의 과정은 훨씬 다양해진다.
가곡면, 노곡면, 도계읍 등의 사례를 보면 복재[점쟁이]가 서낭고사에 적극 관여한 마을이 많다. 복재들이 관여하게 되면 축문을 읽어서 나름의 염원을 담아내기도 하지만 주로 축원경을 구송하거나 소지를 올리며 말로 초들어서 마을 전체의 안녕과 풍요, 다양한 현안에 대하여 축원을 해 주고 가구별 소지를 올릴 때 다양한 염원을 담은 축원을 해 준다. 축문을 고하지 않거나 복재가 없는 마을에서는 마을 주민 가운데 입담이 좋은 사람이 소지를 올리며 축원을 해 준다. 소지를 올릴 때 별도로 가축소지를 올리는 마을도 많다. 노곡면 하월산리와 하반천리에서는 지나가는 보부상이나 장사꾼들도 소지를 올려 달라고 별비를 내고 가면 소지를 올려 주었다. 이는 이곳이 주요 교통로에 해당함을 보여 주는 사례로, 마을 서낭당이 마을 주민만을 위한 제당이 아니라 이곳을 지나는 모든 이의 안전과 행복을 기원하는 신앙의 처소로 여김을 알 수 있다.
수부신은 서낭신을 모시고 다닌 하위 신으로 여긴다. 많은 마을에서 인식하는 ‘수배’는 마을 주민 가운데 서낭신을 잘 모시고 위한 분을 초들어서 모시는데, 옛날부터 서낭신을 잘 모신 사람이 수배 노릇을 한다고 여긴다.
이와 같이 수부신을 위하는 이유는 서낭신이나 토지신처럼 마을 전체를 관장하는 신령으로 인식하여 위하는 것도 아니고 원혼으로 여겨 잘 대해 주어서 해코지를 막자는 의미도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서낭신을 호위하는 신(神)으로서 살아 생전에 마을을 열었고, 마을신으로 좌정한 산신이나 서낭신을 잘 모셨기 때문에 집에서 조상 모시듯 마을에서 잘 위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구체화하면 마을마다 의미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다.
해서낭당형 마을신앙은 제의 구조를 기준으로 5개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서낭당과 해신당으로 구성된 유형, 해신당만으로 구성된 유형, 서낭당만으로 구성된 유형, 서낭당과 해신당이 분리되어 운영되는 유형, 어업과 관련 없는 마을신앙형이다. 이는 다시 용왕제, 수부신 위함, 봉헌체 등의 요소를 기준으로 세세하게 구분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유형이 나타나는 이유는 각 마을의 농업과 어업이라는 생업 기반 비중 차이와 어업과 관련한 사회 및 자연 조건의 차이 등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5개 유형 가운데 비중이 가장 큰 유형은 ‘서낭당과 해신당으로 구성된 유형’이다. 이 유형은 해안 지역 마을신앙의 기본형으로 삼을 수 있다. 즉 해안마을에서는 성황당을 상당(上堂)으로 여겨서 마을 최고의 신이 좌정한 곳으로 인식한다. 이에 비하여 해신당은 하당(下堂)의 의미를 띠는 곳으로, 어민들의 염원을 대변하는 제당으로 여긴다.
[안택고사]
집안의 태평, 가족의 건강, 생업의 번창을 위하여 정기로 하는 가정의례를 안택(安宅)이라고 한다. 삼척에서는 대개 “안택 지내 먹는다”고 하였다. 지역에 따라 텃제라고도 부르고[가곡면 풍곡 1리 덕풍], 간혹 동방제라는 단어도 사용하였다[하장면 어리]. 전통으로 안택의 제주는 집안의 가장이 맡고 독경하는 복재나 무녀를 부르기도 하였다. 가신에게 잔 올리고 절한 뒤 비손을 하거나 경을 읽는 것으로 의례를 집행한다. 시기는 보통 정월이 많다. 대주의 생기복덕에 맞춰서 택일하는 것이 전통 방법이다. 안택에서 모시는 가신은 성주, 조왕, 오방토지지신, 산[군웅], 조상 등이다. 집에 따라 삼신이나 칠성을 함께 모시기도 한다. 제장은 부엌이 가장 많다. 해당 신격이 있는 안방, 마구간, 장독대, 뒤안에서 지내기도 한다. 성주를 비롯한 중요한 신을 모신 후에는 소지를 올려서 신의 뜻을 알아본다. 소지가 잘 올라가면 한 해 무사할 것으로 믿는다. 해당 신과 가족에 이어서 소나 개 같은 가축의 소지도 올려 준다. 또 안택을 할 때는 마을수호신인 서낭당에 제의를 올린다. 어촌에서는 안택을 할 때 서낭당 제사뿐만 아니라 용왕제도 함께 지낸다. 이때 배를 부리는 집에서는 뱃고사도 한다. 삼척에서는 안택을 지낼 때 무당이나 경객을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산간 지역에서는 복재라고 부르는 경객이 안택을 많이 하였다. 홍두깨를 세워서 운수를 점치는 행사도 있다. 홍두깨가 잘 서면 성주를 비롯한 여러 신령이 잘 흠향(歆饗)하였다고 믿는다. 보통 우리나라에서 고사를 지낼 때는 여자가 중심이 된다. 즉 제사는 남자가 주관하고 고사는 여자가 주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삼척에서는 집안의 대주가 안택을 주관한다. 이는 영동 지역 안택의 특징이기도 하다.
[산멕이]
삼척 지역에서는 주로 삼월 삼짇날이나 사월 초파일에 산멕이를 많이 간다. 정월이나 단오에 산멕이를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원래는 날을 받아 산멕이를 하는 전통이 있었다. “산은 산멕이 하는 날 벗겨서 갔다가 낭기에 매 놓고, 내려와서는 새로 끊어 물 떠놓고 맸다. 산멕이는 3년 두리로 4월에 날 받아서 늙은 산 솔밭으로 갔는데 각자 개인으로 간다. 아침에 복재가 오면 주인이 산 앞에서 “산멕이 가십시다” 하고 빈다. 제물은 떡, 고기 등 성의껏 해서 간다. 메는 조상 수대로 준비한다. 조상이 다섯이면 메는 다섯 그릇을 준비한다. 산에 가면 좋은 나무를 골라 그 앞에서 빈다. 산멕이 갈 때 베를 가지고 갔다.[도계읍 점리]” “산멕이 시기는 정월과 3~5월 사이에 가되 가장의 생기를 맞추어 좋은 날을 택하여 가게 된다.[미로면 내미로리]” 신남이나 임원, 용화에서도 정월에 날을 받아 안택을 한 뒤에 그날 산멕이를 갔다는 보고가 남아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날을 고정시켜 놓고 다니는 집이 많아졌다. “산멕이는 사월 초파일에 가는데 올해도 모실 예정이다.[도계읍 점리]” “산멕이는 대덕산으로 다녔다. 터가 정해져 있다. 친척끼리 다니던 곳에서 갈라져 나와 아 버지 대에 집 뒤에다 터를 만들어서 분가하였다. 단오날 산멕이를 하였다.[도계읍 전두 2리]” “산멕이는 삼월 삼짓날 지낸다. 각성끼리 모아서 지낸다.[근덕면]” 그런데 이렇게 날이 고정된 것은 후대의 일로 보인다. 대개 명절을 기하여 날을 고정하는데 여기에 사월 초파일이 포함된다. 특정한 날을 정하는 것보다는 택일하는 것이 부정을 막고 신성성을 담보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날받이는 매우 번거롭다. 언제가 길일인지 알 수 없고, 또 날을 받은 후에 부정한 일이 생기면 취소하거나 연기해야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날을 받아 산멕이를 가는 집이 별로 없다. 현재 전승 양상을 통해 보면 삼척은 주로 봄에 산멕이를 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후대에 이르러 삼월 삼짓날이나 사월 초파일 같은 명절로 고정되는 추세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미로면 내미로리 쉰움산에서의 산멕이 절차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집에서 조상에게 고한 후 짐을 챙겨서 산으로 간다. 과거에는 제관 집에서 출발할 때 쇠소리, 즉 양푼을 두드렸다. 그 소리가 나면 기다리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출발 신호로 알고 따라 나섰다고 한다. 요즘은 미리 올라가는 시간을 알려 주기 때문에 기척만으로 알아채고 함께 집을 나선다. 내미로리의 산멕이 터는 쉰움산에 있다. 제의 장소는 산 중턱의 은사당과 정상의 천제당 두 곳이다. 등산을 힘들어 하는 사람들은 은사당[은선암]에서 지낸다. 쉰움산을 3분의 1 정도 오르다 보면 부정당이 나온다. 여기서 복재가 과일, 떡, 술 3잔을 부어 놓고 부정경으로 부정을 가셔 낸다. 과거에는 짚에 불을 붙여서 마을 사람들이 그 불을 타넘고 가도록 하였지만 요즘은 산불이 날 염려로 인하여 생략한다. 산을 오르려면 힘이 드는 시기여서 이곳에서 술 한 잔씩 마시고 몸을 추스르는 시간을 보낸다. 당에 도착하면 음식을 진설한다. 집안사람끼리 왔을 때는 촌수에 따라 좌우로 자리를 잡고 음식을 놓는다. 요즘은 각성바지가 많이 와서 복재 중심으로 하여 나이 순서대로 자리를 잡는다. 음식을 다 차린 후에 부정을 풀어내는 부정경을 읽는다. 부정경을 마친 후 산신맞이를 한다. 이때 복재가 북을 치며 산신경을 읽는다. 산신맞이가 끝나면 먼산맞이를 한다. 미로 근방에서 제일 큰 산이 태백산이어서 태백 산신을 맞이하는 것이 먼산맞이이다. 윗대에서 태백산을 믿어 온 사람들은 쉰움산에서 먼산맞이를 한다. 그러나 태백산에 다니지 않은 사람들은 먼산맞이를 하지 않는다. 먼산맞이를 할 동안 다른 사람들은 조상 축원에 들어간다. 과거에는 산멕이를 할 때 매년 복재를 앞세워 가고, 5년이나 7년에 한 번 무녀들을 불러 굿을 하였다고 한다. 조상 축원은 합동으로 한다. 합동 축원 후 각 집의 잔맞이를 한다. 자기 조상에게 올린 술과 수저를 들고 “명잔 복잔인데 이거 먹으면 금년에 재수 좋다. 금년에는 걱정 없이 지낸다.”는 복재의 공수를 들으며 잔의 술을 마신다. 잔맞이를 마친 다음에는 삼신당에 올라간다. 은사당에는 삼신당이 없고 천제장에는 100m쯤 뒤에 삼신당이 있다. 삼신당의 돌은 사람들이 돌을 주워서 만든 것이다. 삼신당의 많은 돌 가운데 본인 마음에 드는 돌을 골라 종이와 실 한 타래를 매단다. 각자 돌에 매어 놓으면 복재가 와서 빌어 준다. 이때 깨끗한 메 한 그릇을 들고 대를 내린다. 이것은 삼신이 하강한다는 의미이다. 집안에 따라서 메 그릇에 소나무순을 꽂는 집이 있고, 어떤 집은 숟가락을 꽂기도 하고 또 다른 집은 꽂지 않기도 한다. 복재들은 삼신경을 읽으며 집집마다 삼신을 빌어 준다. 삼신 기도가 끝나면 내려와서 용신당에 간다. 용신당은 조상당 오른쪽에 있는 구멍 파인 바위이다. 이곳에는 자연스럽게 물이 고여 있는데 일 년 내내 가물지 않는다고 한다. 용신에게는 농사에 가뭄이 들지 않도록 비를 적당히 내려 달라고 빈다. 용신제는 마을 주민 모두 합동으로 지낸다. 제물은 간단하게 쌀 한 그릇과 술 한 잔을 올린다. 함께 간 복재는 용신경을 읽어 준다. 축원 후 쌀 한줌씩 집어 용신당에 던진다. 쉰움산 정상의 바위에서 지내는 용신제는 내미로만의 특징이다. 노곡[노곡면], 근덕[근덕면] 지역은 용신제가 없어서 용신제를 지낸 후 다시 조상당으로 와서 군웅 축원을 한다. 군웅 축원은 가축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다. 군웅 터는 따로 없고, 조상당에서 군웅경을 읽어 주며 합동으로 축원한다. 군웅의 제물은 메 한 그릇과 군웅떡이다. 군웅떡은 쌀가루를 익혀 치대서 동그랗고 넓적하며 중앙에 움푹 들어가게 모양을 낸 떡이다. 군웅떡을 ‘동돌개비’라고도 한다. 복재는 각 집의 조상당을 돌며 나오는 점괘에 따라 예방이나 조심하도록 당부한다. 다음으로 말명에게 빈다. 말명은 각 가정의 윗대 조상 가운데 신을 모시던 집이나 뒤뜰에 말명을 모시던 집, 친정과 시집을 포함해서 무업(巫業)을 한 조상이 있는 가정에서만 빈다. 모두 각 집의 조상당에 서 있으면 복재는 말명경을 구송한다. 말명떡은 콩, 팥, 수수 등을 층층이 쌓아 올린 떡이다. 복재는 말명이 잘 받았는지 떡을 던져서 객귀밥으로 주고, 자손들에게도 떡을 주며 “이거 먹으면 고뿔도 안 들고 일 년이 평안하다.”하고 공수를 내려 준다. 말명천은 빨강색·흰색·노랑색으로 된 삼색 천으로, 고사 후 나무에 걸어 둔다. 그런 다음 무명천을 가지고 ‘조상옷 해 입히기’를 한다. 이것을 ‘조상 길 갈라 주기’라고도 한다. 무명천의 크기는 집마다 모두 다르다. 천을 지그재그로 째면서 그 집 조상들을 부른다. 이후 하나의 끈으로 길게 늘어뜨려서 끝단에 작은 돌을 묶어 조상당 앞에 있는 소나무에 던져 걸친다. 반면에 근덕 사람들은 천을 찢어서 산멕이에 참석한 집을 모두 연결시킨 후 조상당 주변의 나무에 금줄처럼 걸쳐 매어 둔다.
마지막으로 뒷거리이다. 제사 음식들을 조금씩 떼어 내 한곳에 모아 놓고 잡신들 잘먹고 가라고 풀어 먹이는 거리인 뒷풀이경으로 마감한다. 복재가 경을 하는 동안 주민들은 음식을 먹으며 노래와 춤을 추면서 흥겹게 논다. 신명나게 놀고 나서 해가 질 무렵에 산을 내려온다. 산을 내려올 때는 술을 마셔서 넘어지고 발목을 삐기도 하지만 “조상님들과 흥겹게 놀다 와서 아무 탈이 없다. 괜찮다.”고 웃어넘긴다고 한다.
산멕이의 경우에도 금기가 있다. 예컨대 집안에 상을 당하거나 손자를 본 경우, 가축이 새끼를 낳았을 경우에는 산멕이를 하러 가지 않는다. 오히려 ‘몸 중의 꽃’이라 해서 당당하다. 산멕이에서는 가능한 한 남녀노소가 많은 집안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하고, 그날 하루 흥겹게 놀 수 있는 화전놀이처럼 인식되고 있다.
[영등고사]
영등은 영등할머니, 풍신할머니라고도 부른다. 바람을 주관하는 여신이다. 농사는 물론 어업도 비바람이 순조로워야 하기 때문에 농어촌을 막론하고 매우 중요한 신으로 믿었다. 영등은 이월 초하룻날 하늘에서 내려왔다가 보름에 올라간다고 한다. 영등이 육지에 내려와 있는 보름 동안 부엌에 면해 있는 뒤란이나 장독대에 모신다. 초하룻날 제물을 차려 놓고 빈 후에 매일 아침마다 물을 갈아 준다. 마지막 올라가는 날에도 제물을 차려 놓고 절을 한다. 풍신이기에 신체는 따로 없다. 그러나 영등을 모신 자리에 한지를 묶어 두어 표시를 남기기도 한다.
으레 영등에는 이월 초하룻날 제물을 차려 놓고 방안에서 빈 다음 떡을 베어 내 양푼에 담아서 뒤란에 내다놓고 다시 빈다. 그리고 떡은 그 자리에 두었다가 하루나 이틀을 보낸 뒤에 가져다 먹는다. 어떤 집은 떡을 시루째 가져다 놓고, 물도 동이째 갖다 놓고 절을 한다[가곡면 풍곡1리]. 영등 제사는 큰방[안방]에서 조상 제사 지내는 쪽으로 안반에다 떡시루, 채소, 고기 찐 것을 놓고 물 한 그릇 떠놓고 지낸다. 이월 보름날 올라가는 영등에는 초하룻날과 같은 음식으로 지낸다. 초하룻날 제사 때 올라가는 영등을 위하여 떡 한 쫄기, 고기 한 쫄기를 놔뒀다가 보름날 그걸 쪄서 함께 올려 보낸다. 장소는 역시 안방에서 지낸다. 영등날 제사를 지내면 항상 올라가는 영등을 위하여 위에 있는 수지를 따로 놔두는 법이다. 영등떡은 다래끼에 담아 두고 이월 보름날 영등이 올라갈 때까지 쪄서 먹었다. 제사 가운데에는 영등이 제일 컸다[원덕읍 노곡1리]. 영등 기간에는 아침·저녁으로 물을 갈아 준다. 풍신할머니가 영험하다고 생각한다. 떡을 찔 때 삶아 놓은 팥을 아이들이 집어 먹으면 그 떡은 김이 올라가지 않는다고 한다. 속으로 잘못했다고 빌면서 물을 한 바가지 떠서 부으면 그때서야 김이 오른다. 영등 기간에는 밖에서 들어온 모든 음식을 먼저 영등 앞에 놓았다가 먹었다. 이웃에서 떡이 들어오면 떡도 거기다 갖다 놓고 조금씩 떼어서 먹었다. 영등은 농사가 잘되고 물이 흔하게 해 달라고 모신다. 이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 게볶대기[장에 가 게를 사서 넣고 무와 장 한 숟가락 넣어서 끓인 찌개] 한 그릇 떠 놓고 밥 한 그릇, 떡, 물을 떠 놓는다. 올라가는 날 보름날에는 떡은 안 하고 밥 한 그릇 해 놓고, 고기가 있으면 놓고 물 한 그릇 떠 놓고, 풍신할머니를 모셔 놓은 종이로 소지를 올린다. 소지가 잘 올라가면 풍신할머니가 잘 있다 올라가신 것으로 믿었다. 소지 종이는 부엌으로 나가는 문에 못을 치고 걸어 놓았다. 소지 앞에는 제물을 놓지 않고 절만 하였다. 소지 종이를 모신 동안에는 아침저녁으로 물을 갈아 준다. 도계에서는 영등날 저녁에 밥 대신 감자송편을 만들어서 먹었다. 떡은 초저녁에 일찍 쪄서 영등을 모시는 댄[뒤란]뿐만 아니라 여러 짐승, 즉 닭장이나 마구간에 떡을 끊어서 갖다 놓고 절을 하였다. 댄에는 떡을 시루째 놓았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장난을 치느라고 거지 차림을 하고 각설이 타령을 하면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떡을 얻어먹었다. 영등떡을 시루째 가져가는 수도 있었다[미로면 내미로리김영자]. 영등할미 앞에서는 “오늘이 이월 초하루 영등날입니다 풍신님 할마이 그저 몰래란[모른다는] 말 마시고 그지 뭐 쇠[소]도 높은 데는 내려딛고 낮은 데는 높여 딛고 그저 [가족 이름 다 대고] 아무것이 산치도 그저 잘 생기를 춰고[가족의 생년월일을 고하고] 빈 다음에 쪽배기에다 거멍[숯거멍] 놓고, 술 붓고, 밥 넣고, 제물 넣고 해서 뒌[뒤란]의 깨끗한 곳에다 내다 붓고 절을 한다.”고 한다[가곡면 오저리]. 이월 영등에는 떡을 한 시루 해 놓고 물을 떠놓고 “이월풍신님 금년 농사 잘되게 해 주옵소서.” 하면서 빈다. 정지[부엌]에서 차려 놓고 하는 사람도 있고 뒤란에서 하는 사람도 있다. 물에다 절가지[젓가락]를 가져다 놓았다. 다 지낸 후 떡을 끊어서 먹고 낮에는 모여 놀았다. 영등은 차좁쌀이나 수수쌀로 팥시루떡을 했다. 송편을 하는 집도 있었다. 젊은 청년들은 걸립(乞粒) 다닌다고 하면서 큰 자루를 들고 집집마다 다녔다. 떡은 잡곡 서너 되를 모아서 한다. 떡이 잘 안 익으면 사람들은 부정을 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하였다. 풍신할머니는 저녁에 왔다가 그 이튿날 간다. 초하루에 왔다가 보름날 간다는 말도 있다. 예전에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물을 떠놓았다[신기면 고무릉리]. 영등에 말을 만들어서 제물을 바치기도 했다. 옛날에 이월 영등할미 올 때는 뒤란에다 상을 차렸다. 짚으로 말을 만든다. 짚에 음식을 싸서 그 말에 실려 담에서 모셨다. 지금 이런 풍속은 다 없어졌다. 요즘은 구들 안에서 물을 떠놓고 하지만 원래는 뒤란에서 지내는 것이다[원덕읍 기곡2리 하촌].
[뱃고사]
배가 있는 집에서는 무당을 불러 뱃고사를 지낸다. 먼저 집에 상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뱃고사의 시작을 알린다. 그리고 다시 음식을 차려서 배로 가져간다. 배로 가져가는 상은 집에서 조상에게 올린 제상보다 작은 규모이다. 그 대신 배성주, 기관방, 기계방, 고물[배의 후미]에 하나씩 네 개의 상을 놓는다. 배에 도착하면 부정을 친다. 이때 짚단에 불을 붙여서 뱃머리부터 선미까지 훑는다. 무당은 배에 올라타서 부정을 치면서 한 바퀴 돈다. 이때 “동서남북 24방에 더러운 부정이 있으면 소멸시켜 달라.”고 빈다. 짚단이 거의 다 타면 바다에 던진다. 부정을 치고 나면 가장 먼저 배성주에게 빈다. 배성주는 남성주와 여성주가 있다. 남성주에게는 흰 무명실을 명태포를 묶어 두고, 여성주에게는 명태포와 함께 남성주보다 화려한 색의 천을 매어 둔다. 배성주의 성별이 다르다고 해서 제의 방식이 다른 것은 아니다. 성주에 이어서 기관방과 기계방에도 빈다. 배의 후미에서는 물에 빠져서 죽은 귀신을 위하여 빌어 준다. 이것은 배 뒤로 귀신들이 따라오지 말라는 의미에서 비는 행위이다. 마지막으로 퇴송하면 뱃고사는 마무리된다. 뱃고사는 봄과 가을에 한 번씩 지낸다. 고기가 잘 안 잡히면 날을 받아서 지내기도 한다. 배를 새로 진수하면 배성주를 걸고 고사를 지낸다. ‘배성주 매긴다’고 하는데 창호지와 실을 선장실에다 걸어 놓고 바다에서 특별한 고기가 올라오면 그 고기의 지느러미를 잘라서 함께 매달아 놓는다. 그렇게 매어 놓았다가 다음 고사에서 태우고 다시 맨다. 배에는 성주만 있다. 여성주는 거의 없고 대부분 남성주이다. 성주는 배 주인을 매기거나 선원들 가운데 올해 누구 운이 대통했다 하면 그 사람 성주를 매긴다. 배성주는 따로 있다. 어떤 때는 그 사람 생기를 따져서 또 매는 수가 있다[원덕읍 월천2리 고포].
[용왕제]
삼척 지역에서 지내는 용왕제는 마을 앞 냇가에서 지내는 경우와 선창이나 바닷가에 제물을 진설해서 용왕에게 풍어를 비는 경우가 있다. 냇가에서 지내는 경우는 한 해 동안 식구들이 객지에서 탈나지 않고, 특히 물가에서 사고가 나지 않도록 기원한다. 용왕제를 지내는 사람은 정월대보름날 식전에 보름밥을 차려서 냇가로 나간다. 주로 그 집안의 주부가 지내며, 용왕에게는 밥을 해서 던져 넣는다. 이때 흰 종이에 집안 식구 수대로 밥을 싼다. 그해 운수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그 식구 몫에는 부적을 미리 구해 놓았다가 한데 넣기도 한다. 용왕에게 재배하고 밥을 냇가에다 던지면서 올해 운수대통하게 해 달라고 빈다. 이를 용왕제 또는 어부제라고 부른다. 식구 가운데 액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새벽에 미리 냇가에 가서 촛불을 밝히고 그 앞에 메 한 그릇을 지어 올린다. 그리고 용왕님께 “나쁜 액운을 모두 막아 주십사.” 하고 빈다. 용왕제에 올린 제물은 집으로 가지고 들어오지 않는다.
[무속]
삼척 지역의 무속은 해안 지역에서 주로 세습무들에 의하여 연행하는 별신굿, 시장을 옮기거나 개설하여 연행하는 별신굿, 주로 단오에 강신무들에 의하여 주로 연행되는 서낭굿, 개인으로 연행하는 재수굿·병굿·혼인굿·오구굿·신굿 등과 함께 각종 사유로 행해지는 비손의례, 고사 등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삼척 후진을 비롯하여 정라진·덕산·대진·궁촌·초곡·임원·노실·원덕에서 지금까지 전승되는 해안마을 별신굿은 원래 서낭굿이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마을에서 어촌계가 주도한 가운데 풍어제라고도 불리며, 동해안 지역에서 활동하는 세습무나 이 지역 강신무들에 의하여 연행되고 있다.
강신무들에 의하여 연행되는 개인 단위의 굿은 삼척 지역 내에 별도로 마련된 산당에서 연행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주요 산당은 도경산당을 비롯하여 신배나무골 산당, 천태밭골 산당, 대덕사 산당, 두타사 등 매우 많다. 산당 이외에도 두타산이나 쉰움산, 대덕산, 육백산 등에서 개인 산제사나 기도·치성을 드리는 사례도 있다.
[삼척기줄다리기]
삼척에서는 ‘게’를 ‘기’라 하고, 줄다리기의 줄이 외형으로 ‘게’를 닮았고, ‘게’가 벽사(辟邪) 기능을 한다는 점에 의하여 ‘기줄다리기’라 하였다고 전한다. 전승 집단의 규모 면에서 보면 삼척기줄다리기는 부내(府內)와 말곡(末谷)으로 나누어 연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근 미로·북평·근덕 등에 있는 주민들도 참여하였기 때문에 ‘열린 고을형’으로 볼 수 있고, ‘큰줄다리기’로도 볼 수 있다. 다만 정월대보름 전에 마을별로 속닥기줄, 중기줄다리기가 있었다. 이는 마을 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닫힌 마을형’이면서 ‘골목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전승 형태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규모에서 큰 것으로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 규모를 연속성을 띤 확대형으로 볼 수 있다.
시기 면에서 본다면 정월 초 마을별로 속닥기줄, 중기줄을 하다가 대보름날 밤에 기줄다리기를 한다. 연행 공간은 오십천사대광장에서 행하여졌다. 이곳은 모래도 일부 있고 자갈밭인 곳도 있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연행되었다고 한다. 1973년 기줄다리기가 복원된 이후 사대광장에서 연행하다가 사대광장이 매립된 이후 중앙통 주도로나 오십천 둔치에서 하였다. 그러다가 현재 엑스포 광장에서 삼척기줄다리기를 연행하고 있다.
줄의 형태 면에서 삼척기줄다리기는 암줄과 숫줄로 나뉜 쌍줄 형태이다. 자세하게는 몸줄에 곁줄인 게줄[기줄]을 매어서 이를 당기는 형태이다. 물론 동네에서 행하는 속닥기줄이나 중기줄은 외줄인 것으로 보인다.
편은 지역별로 가른다. 오십천[또는 삼척 읍성] 기준으로 부내와 말곡으로 나누어 연행되었다.
[술비놀이]
정월 대보름에 행해진 기줄다리기에 대비하여 마을마다 ‘줄’을 제작한다. 크기는 한 뼘 이상이고 길이는 50발 이상이어서 사람의 힘으로 튼튼하고 굵은 줄을 만들기는 매우 어렵다. 이에 따라 기줄다리기 줄을 틀 때 술비통을 이용한다. 술비통을 이용하여 줄을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새끼줄이나 칡 줄을 구멍을 통하여 세 가닥이 한데 모여 5㎝의 줄이 되고, 이 줄을 다시 세 가닥을 한데 모아 틀어서 한 줄로 만드는 과정을 반복한다. 줄을 틀 때 풍악을 울리면서 노래를 부르며 작업을 한다. 이 노래를 술비통 노래라 하고, 이와 관련된 제반 놀이를 술비놀이라 한다.
현재 성북술비놀이가 유명하며, 술비놀이보존회가 결성되어 그 맥을 이어 가고 있다.
이창식은 삼척 기줄다리기와 관련하여 술비통과 기줄다리기 관련성 검토와 기줄다리기 담당자인 마을 주민들의 관습 및 의식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창식은 삼척 읍성을 기준으로 현지 조사를 하였으며, 술비통의 어의(語義)는 순우리말 시늉으로, 틀에 기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술비통의 통 구조는 3개의 구멍이 있는 송판을 사용한다. 보통 술비통 크기는 직경 30~50㎝, 두께 3~5㎝이다. 받침대 4개와 지름대 3개로 이루어져 있다. 크기는 마을마다 차이가 난다고 하였다.
기줄을 트는 과정은 3명이 줄을 넣고 3명이 보조 역할을 한다. 반대편에서 일렬로 서서 줄을 모아 반대 방향으로 단단히 튼다. 이때 ‘ㄹ’자(字) 곰배[‘쐐기’라고도 함]를 사용하여 더욱 튼튼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기줄을 제작하는 단계는 ‘짚을 넣어 5㎝ 줄 제작 → 다시 3가닥이 되면 술비통에 넣어 꼬면 15㎝ 줄 → 다시 3가닥을 넣어 꼬면 45㎝가량의 기줄 완성’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이렇게 굵기 45~60㎝, 길이 60~100m 정도의 기줄을 마을마다 제작하여 정월대보름 기줄다리기에 대비하였다.
술비 노래는 줄을 꼬는 과정[술비하는 동안]에 노래를 부른다. 노래 특징은 첫째 유희요(遊戱謠)로서 사회 풍자, 신세 타령, 부락 경관, 소망, 기줄다리기 관련 설화 등을 담고 있다. 둘째 농악을 동원한다. 굿거리 장단을 주로 사용하였다. 셋째 술비를 끝내면 완성된 줄을 어깨에 메고 부락민은 ‘어화’, ‘어화’를 반복하면서 일종의 지신 밝기를 한다. 이때 어화는 기쁜 마음을 나타내는 후렴구이다.
이와 같은 술비놀이 기능을 이창식은 첫째 줄 꼬는 기계이고, 둘째 줄다리기를 대집단 민속놀이로 형성시킨 민속 기능이 있으며, 셋째 마을별 인화 단결을 추구한 예비 민속놀이로 보았다. 또 이창식은 술비통과 줄다리기에 나타난 민중 의식을 경합과 오락에 의해 즐기는 오락성, 놀이 자체에 밀착되어 신경을 내고 즐겁게 몰입하는 자율성, 여러 속신과 제의가 내재하는 신앙성[주술성(呪術性)]으로 평가하였다.
[농악]
정초부터 대보름 전후에 동네 농악대가 집집을 돌며 즐겁게 놀고 축원해 주는 것을 지신밟기[전국]·매구[매귀(埋鬼)][호남]·걸립(乞粒)[중부] 등으로 다양하게 불러 왔다. 그러나 평안도·함경도 등 북쪽에는 농악대가 없었으니 지신밟기도 없었다.
삼척시 조비농악 사례를 중심으로 삼척 지역 농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부터 입춘날 선농단에서 선농제를 지낼 때 행한 농악으로 특이한 가락과 복색, 진법이 다른 지역과 차이가 난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선농제가 폐지된 이후에도 삼척시 조비동을 중심으로 계속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조비농악은 정월대보름에 이 지역에서 행하는 기줄다리기를 하기 전에 마을별로 제작한 줄을 어깨에 메고 거리 행진을 한다. 이때 조비농악이 앞장서서 이를 선도하였다.
조비1리 농악의 쇠가락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시작] - 품앗이 굿 → [1채] - 멍석말이 → [2채] - 양상 → [3채] - 일자치기 → [4채] - 발춤놀이 → [5채] - 사물놀이 → [6채] - 영동봄 굿 → [7채] - 들놀이 상모 → [8채] - 상모놀이 → [9채] - 길군악 → [10채] - 상미 놀이 → [11채] - 다리굿 → [12채] - 성황굿
조비농악의 구성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지신밝기[정월대보름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지신을 밟으며 ‘고사 덕담가’를 부름]
② 질먹기[백중에 마을 주민 모두가 모여 농악을 치며 노는 놀이]
③ 삼태 국수 먹기 놀이[정월 13일에 삼대를 세우고 삼태 국수를 먹었다. 음력 2월 지신밟기 놀이 전에 행한 놀이임]
④ 상사굿[상쇠가 먹이고 다른 사람들은 장단에 맞추어 ‘어럴럴럴 상사디야’라고 후렴을 하는 놀이임]
⑤ 술비놀이[기줄다리기를 위한 줄을 꼴 때 농악을 하는데 이를 지칭함]
⑥ 마당굿[서낭굿] - 길군악으로 동리 출발 - 무동·상쇠·악기순으로 정렬 - 전주악 - 대중 인사 - 대열을 푼다 - 오방지신굿 - 농사풀이 - 마당놀이 - 상모놀이 - 사물놀이 - 영동봄굿 - 발춤놀이 - 나비놀이 - 동고리 - 소고놀이 - 한바탕 놀이 - 채장 춤굿 장단 - 개인놀이
[민요와 설화]
민요란 민중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전승되어 온 비전문 민중 노래다. 민요 속에는 지역의 다양한 생활상은 물론 민중의 진솔한 생각과 상상력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삼척 지역에 전승되고 있는 민요는 주로 메나리로 불린다. 이는 삼척 지역의 지리 환경이 들과 산 및 강·바다를 끼고 있기 때문에 들을 배경으로 한 농업 메나리, 산을 배경으로 한 벌목이나 채취와 관련한 메나리, 강과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어업과 관련된 메나리가 전하고 있다. 이외 길쌈을 하면서 불렀던 메나리도 전한다.
설화는 서사 구조가 일정한 구비 전승을 말한다. 삼척 지역의 경우 신화, 전설, 민담 등 다양한 층위의 설화가 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