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4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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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星州晩歸亭 |
이칭/별칭 | 만귀산방(晩歸山房)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신계2길 38[신계리 70]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신태수 |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정자.
[개설]
성주 만귀정(星州晩歸亭)은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가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만귀(晩歸)’는 진작에 뜻을 세워 놓고도 늦게 고향에 돌아왔다는 뜻이다. ‘만귀정’ 편액의 글씨는 석농(石農) 이종우(李鍾愚)가 썼다. 이원조는 소년등과(少年登科)하여 제주목사와 경주부윤, 대사간(大司諫), 공조판서(工曹判書) 등을 지냈고, 관직에 있을 동안 국정의 쇄신책을 충간하고 스스로 청렴함을 지켰다. 한편 포천 계곡 일대에 구곡(九曲)을 설정하고 구곡시를 붙여 지었다. 이원조가 성주 만귀정에서 지은 저술에는 이황(李滉)의 주리론적 학풍이 잘 나타나고 있고, 이러한 철학적 입장은 조카 이진상(李震相)에게 이어져 이일원론(理一元論)으로 구체화되었다. 성주 만귀정 입구에는 이진상이 세웠다는 철제 ‘고판서 응와 이선생 흥학 창선비(故判書凝窩李先生興學倡善碑)’가 있다.
[위치]
성주 만귀정은 성주군 가천면 신계2길 38[신계리 70번지]에 있다. 신계리 마을 회관에서 남동쪽으로 가야산(伽倻山) 연봉을 보며 500여 m 이동하면 마수 폭포와 만귀정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에서 약 350m 완만한 경사로를 올라가면 폭포수 소리가 나는 곳에 만귀정이 있다. 만귀정 아래에는 화죽천(花竹川)의 상류가 만들어 낸 2단의 맑은 소가 자리한다. 화죽천은 가야산 주봉인 칠불봉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이다. 이원조는 이곳을 홍개동(洪開洞)이라고 이름 지었다.
[변천]
응와 이원조는 1843년(헌종 9)에 제주목사를 그만둔 후 정자 건립에 필요한 목재와 기와를 준비하고, 1844년(헌종 10)에 평안도 자산부사(慈山府使)로 있으면서 소눌(小訥) 조석신(曺錫臣)이 쓴 ‘만귀정’ 글씨를 받았다. 이후 청천(淸川) 수렴동(水簾洞)에 터를 마련하였으나 조암(組巖)의 언덕 아래로 옮겼고, 다시 현재의 위치에 터를 닦아 1851년(철종 2)에 성주 만귀정을 지었다.
[형태]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집이다. 가운데에 2칸 대청이 있고, 양측에 온돌방이 1칸씩 배치되어 있는 중당 협실형(中堂夾室形)이다. 현재 본채와 대문, 관리사와 부속 정자인 만산일폭루(萬山一瀑樓)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은 평삼문(平三門)이고 ‘만귀산방(晩歸山房)’ 편액이 걸려 있다. 관리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지붕은 우진각이다. 만산일폭루는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팔각지붕이며, 성주 만귀정이 있는 언덕의 아래 폭포가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현황]
성주 만귀정은 2004년 3월 11일에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성주 만귀정은 응와 이원조가 만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서 많은 저술을 남긴 곳이다. 포천구곡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경치가 뛰어난 9곡 홍개동에 지은 정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