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0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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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慈藏律師 |
영어의미역 | Master Jajangyulsa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최연주 |
[정의]
삼국시대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있는 통도사를 창건한 승려.
[개설]
자장율사는 신라에 화엄 사상을 최초로 소개한 승려이다. 자장율사가 생존했던 시기는 신라가 삼국 통일의 과업을 성취하려는 결의를 굳히는 시기로서 자장율사가 담당한 역할은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컸다. 늦게까지 아들이 없었던 자장율사의 아버지인 김무림은 불교에 귀의하여 아들을 낳으면 시주하여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이 되게 할 것을 축원하면서, 천부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하였다.
608년(진평왕 30)에서 614년(진평왕 36) 사이 어느 날 자장율사의 어머니가 별이 떨어져 품 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석가모니가 탄생한 사월초파일에 자장율사를 낳았다고 한다. 『속고승전(續高僧傳)』에서는 자장율사를 신라의 왕자라고 하여 그 가계가 진골 귀족 가운데서도 왕실과 친연성이 깊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누이의 아들인 명랑(明郞) 등의 3형제가 모두 출가하여 승려가 된 사실로 미루건대 불교적인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자장율사의 출가 동기에 대해서도 부모상을 당하였다는 설과 어려서 살생을 좋아하여 매를 놓아 뀡을 잡았는데 그 꿩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느낀 바 있어 출가했다는 설이 있다. 자장율사는 출가하여 산으로 들어가 고골관[枯骨觀 ; 고골관이란 백골관(白骨觀)으로도 부르는데 시체가 썩어서 백골로 화하는 모습을 관(觀)하는 것]을 닦았다고 한다. 자장율사는 만년에 정암사(淨岩寺)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다고 전한다.
[가계]
자장율사(慈藏律師)의 성은 김씨이며, 속명은 선종랑(善宗郎)으로 아버지는 신라의 진골 출신인 김무림(金茂林)이다. 자장율사의 아버지는 신라 17관등 중 제3위에 해당하는 소판(蘇判)의 관직에 있었다.
[활동사항]
자장율사는 638년(선덕여왕 7)에 승실(僧實) 등 제자 10여 명과 함께 당(唐)나라로 가서, 먼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물러 있다는 청량산(淸凉山)의 문수보살상에 기도하였다. 그 뒤 장안(長安)으로 갔는데, 당나라 태종이 사신을 보내어 자장율사를 위로하고 승광별원(勝光別院)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후한 대접을 하였다.
후일 태종에게 글을 올린 뒤 승광별원을 떠나 장안의 남쪽 50리쯤에 있는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의 동쪽 산록으로 들어갔다. 당시 종남산은 계율학(戒律學)의 중심지였는데, 종남산에서 사분율종(四分律宗)을 펴고 있던 도선율사(道宣律師)로부터 정중한 예우를 받았다. 자장율사는 종남산에서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3년 동안 수도하다가 다시 장안으로 가서 태종에게서 비단 200필을 받는 등 두터운 예우를 받았다.
643년에(선덕여왕 12) 선덕여왕은 당 태종에게 글을 보내어 자장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귀국길에 본국 신라에 불상과 불경 등이 미비함을 생각하고 대장경 한 질과 번당(幡幢)·화개(華蓋) 등을 골고루 마련하였다. 이때 가져온 400여 함의 장경(藏經)은 뒤에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에 봉안되었다. 왕은 그를 분황사(芬皇寺)에 머무르게 하고 대국통(大國統)으로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자장율사는 『섭대승론(攝大乘論)』 등 대승 경전을 설(說)하기도 하였고, 『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羯磨私記)』, 『십송율목차기(十誦律木叉記)』 등 율(律)에 관한 주석도 하였는데 이는 당시 불교 국가의 이념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황룡사에서 7일 낮과 밤 동안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설했는데 이때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구름 안개가 자욱이 끼어 강당을 덮었다고 한다.
645년(선덕여왕 14)에는 황룡사(皇龍寺)에 9층탑을 세우고, 제2대 주지로 취임하였다. 자장율사가 왕에게 9층탑 건립을 건의한 것은 당시의 어려운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호국정신과 삼국통일의 염원에서였다. 646년(선덕여왕 15) 선덕여왕의 명에 따라 자장율사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통도사를 창건하고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은 것은 통도사가 우리나라의 불사리(佛舍利) 신앙의 중심을 이루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삼국유사』권5, 자장정율조(慈藏定律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나라에서 계(戒)를 받고 불법(佛法)을 받드는 것이 열 집에 여덟아홉 집이나 되었으며 머리를 깎고 승(僧)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해마다 불어났다. 이에 통도사를 창건하고 계단(戒壇)을 쌓아 사방에서 모여드는 사람을 받아들였다."
특히 자장율사는 통도사 대웅전 뒤 주련(柱聯)에 다음과 같은 불탑게(佛塔偈)를 써 놓았다. "만대까지 불법의 수레를 굴린 삼계의 주인/ 쌍림에 열반하신 뒤 몇 천년이던가/ 진신사리 오히려 지금도 있으니/ 널리 중생의 예불 쉬지 않게 하리(萬代轉輪三界主 雙林示寂幾千秋 眞身舍利今猶在 普使群生禮不休)."
[학문과 사상]
자장율사가 『화엄경』을 강(講)하고 화엄교법(華嚴敎法)을 천명할 때 52명의 여인이 나타나 법을 듣고 깨닫자 문인(門人)들이 그 수만큼의 나무를 심어 이적(異蹟)을 기념하였는데, 그 나무를 지식수(知識樹)라고 불렀다. 이로 인하여 신라에 화엄사상을 최초로 소개한 인물을 자장율사라고 보고 있다. 특히, 자장율사는 신라야말로 예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은 터전이라고 믿었는데, 그러한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이 『삼국유사』의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자장율사가 돋보이는 것은 오대산의 신라 적 설정때문이다. 『화엄경』에 따르면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상주도량(常住道場)으로서 중국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한 오대산이 신라에도 있으며, 문수진신(文殊眞身)과 5만의 여러 불·보살이 머무르고 있다는 신앙을 신라에 전하였던 것이다. 자장율사는 사후 신라 10성(聖)의 1인으로 추대되어 흥륜사(興輪寺) 금당(金堂)에 모셔졌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1권,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 1권, 『사분율각마사기(四分律珏磨私記)』 1권, 『십송율목차기(十誦律木叉記)』 1권, 『관행법(觀行法)』 1권 등이 있었으나, 현재 전해오지는 않는다. 다만, 일본 승려 양충(良忠)의 『법사찬사기(法事讚私記)』 중에 자장의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에서 따서 옮긴 구절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