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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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建築 |
영어음역 | Geonchuk |
영어의미역 | Architecture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집필자 | 정연학 |
[정의]
경기도 용인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건물을 설계하고 짓는 예술 또는 기술이 낳은 구축물.
[개설]
건축은 인간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쉼터와 안락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등 다양한 인간 활동을 위한 유용한 공간도 제공한다. 건축의 유형은 일반적으로 주거건축, 종교건축, 관청건축, 휴양건축, 복지와 교육건축, 상업과 공업건축 등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각 영역별 건축의 특색은 주로 역사 문화적인 조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나타난다. 용인시에는 전통가옥, 전통사찰, 서원, 향교, 사당, 누정 등의 역사적인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다.
[전통가옥]
1. 자연환경과 주거
주거 문화는 지역의 자연환경과 주민 생활과의 관계를 가장 뚜렷하게 나타내 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주거 경관이 하나의 문화적 이미지인 동시에 구조적, 상징적 환경에 속하기 때문이다. 용인시의 주거 환경도 우리나라 일반 농촌과 마찬가지로 배산임수의 지역에 집촌의 형식을 취하고 마을 앞에는 넓은 들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마을 앞 작은 도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민가가 자리하고 있다. 용인 지역은 ‘ㄱ자형’을 기본형으로 하면서 ‘ㅡ자형’ 또는 ‘ㄴ자형’ 부속채를 가진 가옥, 그 외 ‘ㄷ자형’, ‘ㅁ자형’ 및 여러 가지 변형된 가옥이 다양하게 분포한다. 이러한 다양성은 용인 지역의 자연환경과 문화적 배경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2. 가옥의 특성
용인 지역에서 가옥의 벽체로 사용된 건축재로는 수숫대, 갈대, 대나무 등이 있으며, 이 중 주로 사용된 것은 수숫대였다. 수숫대를 자리처럼 엮어 벽체로 세우고 안팎으로 진흙을 발라 벽을 두껍게 만들었다. 상류층 가옥은 벽의 하단은 돌로 쌓고 윗부분은 백회를 발랐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진흙에 짚을 섞어 틀에 찍어낸 후 볕에 건조시킨 흙벽돌집이 나타나게 되었다.
건물의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 석주, 디딤돌, 축대, 장독대, 우물, 구들장, 담벼락 등에는 돌이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다듬은 돌의 사용을 규제하였기 때문에 서민층 가옥에서는 다듬은 돌을 사용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대부들이 많이 거주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갈담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 등 여러 동족촌(同族村)에서는 다듬은 돌을 사용한 가옥들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용인 지역 전통가옥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석재는 편마암계 암석들이다. 얇고 판판한 돌은 구들장으로, 두껍고 큰 돌은 주춧돌과 댓돌 등으로, 기타 잡석은 담을 쌓는데 사용하였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갈담리에는 돌담으로 이어진 고샅이 남아있다. 그 외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원삼면, 양지면 등의 화강암 지대에 많이 생산되는 석비레와 백토 등으로 벽체, 구들장, 부뚜막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3. 가옥의 형태
용인 지역을 대표하는 가옥형은 ‘ㄱ자형’(곱패집)이다. 그러나 ‘一자형’, ‘二 자형’, ‘ㄷ자형’, ‘ㅁ자형’ 등 남부 지방과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가옥들도 분포한다. 그 외 완벽하지는 않으나 동부 산간 지방에서 볼 수 있는 복렬형 가옥도 간혹 보인다.
‘一자형’의 가옥은 본래 차령산맥 이남에 많이 분포하지만 용인 지역에도 이러한 가옥이 약간 남아 있다. 이는 아마도 용인 지역이 충청북도 진천군, 충청북도 충주시, 충청남도 천안시, 충청남도 아산시 등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문화적인 교류도 활발한 데서 연유된 것으로 사료된다.
‘一자형’ 집은 대체로 세 칸 형~다섯 칸 형 살림채와 부속채로 구성되어 남부 지방의 중농 가옥 수준에 해당된다. 그러나 ‘一자형’ 집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 등지에 소수가 남아있을 뿐 보편적으로 분포하지는 않는다. ‘ㄱ자형’ 집의 구조는 부엌-안방-마루-건넌방 순으로 되어 있으며, 안방에 윗방이 딸려 있는 곳도 있다. ‘튼 ㅁ자형’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진 일반 민가에서 많이 보이며, 중농 이상 민가의 경우에도 많이 나타난다.
4. 주요 전통가옥
1) 용인 이주국 장군 고택
1753년에 건축된 용인 이주국(李柱國)[1721-1798] 장군 고택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에 있으며,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는 ‘ㄱ자형’으로 왼쪽부터 광·부엌·안방·대청·건넌방 순으로 되어 있다. 안방 뒤쪽과 건넌방 앞에 각각 방이 있고, 안채의 대청마루는 긴보 다섯 량, 옆쪽은 1고주 다섯 량으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네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왼쪽에 청방을 두고 가운데 두 칸에 방과 마루, 오른쪽에 다락방과 아궁이가 있다. 행랑채는 앞면 일곱 칸으로 대문·방·창고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가옥의 입지와 구성, 공간 분할, 조경수법 등에서 조선시대 가옥의 고전적인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2) 용인 전 음애이자고택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에 있는 용인 전 음애(陰崖) 이자(李耔)[1480-1533] 고택은 조선시대 중기에 세워졌으며 음애 이자 묘역과 함께 경기도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바닥 위에 돌로 30㎝ 정도 높게 기단을 만들고, 자연석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워 지은 집으로 전형적인 ‘ㄷ자형’집이다.
안마당에는 우물이 있고 집 주위로는 담장이 둘러져 있다. 집 내부의 서까래 등의 부목들은 새로 보수를 하였으나 자연석 주춧돌, 기둥, 창문 등을 통해 100년 역사가 넘은 집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못이 중간 중간 보이고 댓돌 등도 오랜 세월이 지났음을 보여준다. 용인 전 음애이자고택의 특징은 안채와 사랑채가 분리되어 있지 않아 중담이 설치된 반가와 비교해서 보다 개방적인 가옥 형태임을 알 수 있다.
3) 남사면 박씨종가 고택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중농 가옥이다. 여섯 칸으로 된 안채와 다섯 칸으로 된 사랑채로 이루어졌다. 안채는 기와집으로 세 칸 대청을 중심으로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사랑채는 초가였던 것을 슬레이트로 개량하였다. 곳간이 둘이고 광도 있다. 남사면 박씨종가 고택에는 대문 앞에 볏단을 놓을 수 있는 볏단간과 나무를 쌓을 수 있는 나뭇간이 있다.
사랑채의 사랑방 옆에는 외양간이 있다. 안채는 부엌-안방-윗방-마루-건넌방 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안방과 윗방 사이는 쌍여닫이문이 달려 있다. 부엌에는 나무와 부엌살림을 놓을 수 있는 광이 있고, 담 한쪽에는 장독대가 놓여 있다. 벽면은 흙벽으로 마감하였고, 대문의 문턱은 농기계들이 쉽게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잘라 버렸다.
4) 이광윤 가옥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유운리에 있는 총 스물일곱 칸으로 된 조선 후기의 전통가옥이다. ‘ㄱ’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 곳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에는 전퇴가 있으며, 우물마루가 깔린 대청이 중심에 있다. 왼쪽에 건넌방, 오른쪽에 두 칸 크기의 안방이 있다. 안방 옆으로는 부엌과 광이 있다.
대문 왼쪽에 있는 사랑채에는 한 칸 크기의 사랑방과 두 칸 크기의 사랑방이 있다. 정면 여섯 칸으로 앞쪽에 퇴가 있는 사랑채의 창호는 모두 쌍창과 영창이 갖추어진 이중창을 쓰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 초가지붕이었는데, 지금은 안채만 초가로 남아 있다. 외양간과 뒷간은 대문 오른쪽에 있다.
5) 이용호 가옥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에 있는 ‘一’자형 네 칸 가옥으로 조선 후기에 건립되었다. 안채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두 줄 박이 구조를 가진 겹집으로, 건물의 폭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안채는 건넌방-부엌-안방과 툇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마루와 안방이 같은 칸에 있고, 부엌이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위치한다.
사랑채는 개조하지 않은 원래 모습 그대로인데, 잿간-뒷간-헛간-대문-사랑방-헛간-광-나뭇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의 모든 공간은 현재 수납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집 한쪽에는 장독대가 있고, 김치 광을 현대식으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6) 이은수 가옥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에 위치한 전통가옥으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ㄱ’자형이며, 대문을 기준으로 좌측에는 사랑채, 우측에는 행랑채가 있다. 안채는 부엌-안방-마루-건넌방 순으로 배치되어 있고, 행랑채는 건넌방-부엌-광-방-외양간-뒷간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이은수 가옥의 원래 주인은 자손들이 많아 행랑채에도 방을 만들었다. 현재 이 방들은 광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랑방은 두 칸이고, 방 안에는 벽장이 있다. 사랑방에는 쌍미닫이를 달았고, 쪽문 쪽으로 툇마루를 달았다. 앞마당 한쪽에는 뒷간이 있다. 뒷간의 공간은 절반은 광으로 절반은 뒷간으로 사용하도록 나누어져 있다. 뒷간 절반에는 멍석과 오줌장군 등을 놓을 수 있도록 턱을 대었다.
7) 정병화 가옥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촌1리에 있는 대표적인 상류층 전통가옥으로 현재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6호로 지정되어 있다. ‘ㄱ’자형 안채, ‘一’자형 사랑채와 행랑채로 이루어진 ‘ㅁ’자형 집이다. 안채는 유마루-건넌방-대청마루-안방-고방-부엌-나뭇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루는 여섯 칸으로 ‘육간 마루’라고 부른다.
사랑채는 작은사랑-큰사랑-유마루-아궁이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랑방 한쪽에는 툇마루를 달았다. 행랑채는 헛간-대문-문간방-문간방-부엌-광-광-광안 뒷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엌에는 솥이 두 개 걸려 있어 행랑채에 사는 사람이 따로 살림을 꾸릴 수 있게 하였다.
8) 황무성 가옥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에 있는 ‘튼ㄱ자형’ 전통가옥으로 ‘一자형’ 안채와 ‘ㅣ자형’ 부속채가 ‘ㄱ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본래 네 칸 전퇴집이지만 근래에 창고를 증축하였다. 중앙의 부엌 우측에 툇마루를 통해 출입하는 안방과 윗방, 그리고 좌측에 건넌방이 있다. 사랑채에는 왼쪽으로부터 잿간, 외양간, 대문간, 사랑방, 나뭇간 등이 배치되어 있다. 변소는 잿간 안에 있다.
황무성 가옥의 아랫방은 원래부터 사랑방으로 쓰기 위해 지어졌다. 건넌방의 방문은 측면으로 나 있어 이는 근세 양식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전통적 간잡이 방식에 가깝다. 또한 건넌방이 머리에 붙지 않고 부엌 아래쪽에 붙어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내륙지방의 방식이다. 건넌방 앞에는 가마솥이 걸려 있고, 대문에서는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는다.
[전통사찰]
용인 지역의 전통사찰은 신라시대에 세워진 백련사(白蓮寺), 용덕사(龍德寺) 등이 현재까지 남아 있고, 박곡사(朴谷寺)는 절터만 남아 있다.
1. 백련사
백련사는 801년(애장왕 17)에 신응(愼應)이 창건한 절로서, 고려 말에 중수된 이래 몇 번의 중건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무학대사가 중건할 때 조성한 18개의 나한상 가운데 14위가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대웅보전은 1990년 당시 주지였던 성월화상이 백산(柏山)거사의 시주로 새로이 중창하였다.
평면은 도리통 세 칸, 양통 세 칸으로 규모는 크지 않은 편이며, 팔작지붕을 한 불전이다. 도리통은 어간을 협간에 비해 약간 넓게 설정하였고, 양통은 중앙 간을 전후 툇간에 비해 약간 넓게 설정하고, 전체 편면은 방형에 가깝다. 내부에는 후면 벽에 거의 붙여서 두 개의 고주를 세우고 그에 의지해 후불벽과 불단을 마련하였다.
2. 용덕사
용덕사(龍德寺)는 신라시대 문성왕[839~857년 재위] 때 영거선사(靈居禪師)가 창건하였고,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삼층석탑과 보살상, 철인(鐵人) 삼위를 조성하면서 중창하였다고 한다. 용덕사의 요사채 뒤쪽에는 도선국사가 지었다는 굴암이 있다. 용덕사를 일명 굴암절이라고 하는 것도 이 석굴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자연석 암반에 약간의 인공을 덧붙여 만든 것으로 천장에 나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겨우 한 줄기 빛만이 스며들어 대낮에도 몹시 어둡고 또 좁다. 전체적으로 원구의 형태인 이 암굴 안에는 500나한상과 보살상, 그리고 철인상들을 안치했다고 전한다.
[서원]
1. 심곡서원(深谷書院)[경기도유형문화재 제7호]
조선시대 중종 때의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뜻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입구의 홍살문과 내·외삼문, 강당인 일조당(日昭堂), 사당이 거의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는 전형적인 서원 건축의 구조를 보이고 있다. 강당 북동쪽에는 장서각(藏書閣)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 반대편엔 고직사(庫直舍)가 있다. 원내에는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가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고풍스러운 맛을 느끼게 해준다.
2. 충렬서원(忠烈書院)[경기도유형문화재 제9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1576년(선조 9) 정몽주와 조광조를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모셨다. 임진왜란 때 서원 건물이 소진되어 1605년(선조 38)에 사우 세 칸, 동서재 두 칸, 문루 세 칸으로 중건하였다. 문루 위층은 강당이며, 아래는 문주방(門廚房)과 고사(庫舍) 등을 갖추었다.
1972년 사당을 전면 보수하면서 가장 위쪽에 사당이 있고, 아래로 가면서 솟을삼문, 강당, 솟을삼문의 순서로 배치된 단순한 형태이다. 서원 입구에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고, 서원 내부에는 정몽주를 주벽으로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고, 좌우에는 손자인 정보(鄭保)와 이시직(李時稷)의 위패가 함께 봉향되어 있다.
[향교]
1. 용인향교(龍仁鄕校)[향토유적 제1호]
용인향교는 1400년(정종 2)경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본래의 위치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마북동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용인읍지』에 의하면 ‘용인향교의 대성전은 세 칸이고 앞에 퇴를 달았다’고 나와 있으며 크기는 지금의 규모와 같다. 그 외에 신문(神門)이 세 칸 있었고, 제사를 지냈던 제사청(祭祀廳)이 세 칸, 제기고(祭器庫)가 세 칸 있었다. 또한 명륜당이 세 칸이고 좌우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각각 네 칸이었다. 그 앞으로 외삼문(外三門)이 세 칸이며, 한 칸으로 된 홍살문이 있었다고 한다. 명륜당은 1950년대에 개축을 하였다.
2. 양지향교(陽地鄕校)[경기도문화재자료 제23호]
양지향교는 1523년(중종 18)에 초창되었다고 한다. 1981년 보수 작업이 실시되어 대성전, 명륜당, 내삼문 등이 해체되면서 1697년(숙종 23)에 제작된 망아와 수막새가 발견되고, 들보에는 1792년을 알리는 상량문이 있어 향교가 여러 차례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명륜당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이었던 것을 1971년 복원하면서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으로 확대하였다. 내삼문은 솟을삼문으로 양 옆에 방을 만들어 제기고를 겸하고 있으며 박공지붕이다. 대성전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이며 박공지붕에 방풍판이 있다. 한편 전면의 기둥이 팔각인 것은 경기도에서 유일하다.
[사당]
1. 효렴사(孝廉祠)
조선시대 태종 때 청백리 최유경[1343-1413]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한국전쟁과 1960년대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989년에 중건하였다. 사당 입구에는 솟을대문이 세워져 있고, 좌우에는 해태상이 있는데 화재 막이를 위한 벽사적인 의미이다. 사당은 바른층 장대석 쌓기 기단 위에 정평 주추를 놓고 원주를 세웠으며 외진주 툇간이 있는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 초익공 건축물로 겹처마에 한식 골기와를 얹었다.
2. 현조사(顯祖祠)
조선시대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의 생모 전씨[1421-1500]의 신위를 봉안하고 제사하는 사묘이다. 사당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박공지붕으로 건물로 처마 밑의 건물 중앙에 현조사란 제액의 현판 한 좌가 있고 좌측에 중수기 한 좌가 있다. 기둥에는 주련을 달았고, 좌우에는 풍벽을 달았다.
3. 영모재(永慕齋)
영모재는 포은 정몽주 선생 묘 아래에 있으며, 17세기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문간채는 정면 다섯 칸, 측면 한 칸, 납도리 5량 가로 솟을 박공지붕이다. 장대석 기단위에 덤벙 주추를 놓고 원추를 세웠으며 전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에 한식 골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이다. 1980년대에 해체 보수하였으며, 여섯 칸 대청과 서측 협칸에는 유사실(有司室)이 있고, 동측에는 종주실(宗主室)이 있다. 문간채 우측에는 제사에 필요한 제구, 제기 등을 보관하는 전사청이고 좌측은 제관이나 제례를 주관하는 전임실로 사용되었다.
4. 조사사당(趙師祠堂)
조사는 태조 이성계의 생질이다. 조사의 유언에 따라 정몽주의 무덤 근처에 묘를 쓰게 되었고, 충렬서원 근처에 사당을 세우게 되었다. 사당은 솟을삼문과 사당으로 구분된다. 솟을삼문은 원추형 주추 위에 원주를 세웠고 상방에는 홍살문을 두었다. 사당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주심포식 이익공 팔작지붕이다.
5. 유덕재(維德齋)
오윤겸(吳允謙)이 1635년(인조 14)에 세상을 떠나고 지은 재실이다. 본래의 재실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 팔작지붕에 한식골기와를 얹은 건축물이었으나 재실 우측에 영당이 있었으나 건물이 낡아 1970년대 중반 건물을 모두 헐어버리고 지금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복원된 재실은 솟을삼문, 재실인 유덕재, 솟을삼문, 사당의 순서로 배치되었다. 재실은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이고 사당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심대장군 사당에는 장군의 신위를 비롯한 세 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사당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이고 정면에는 툇간이 있다. 지붕은 부연을 단 겹처마이며 한식골기와를 얹은 맞배지붕으로 좌우에는 방풍벽이 있다.
7. 남곡재(南谷齋)
남곡재는 이석지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를 받드는 사묘이다. 이석지는 고려시대 1347년(충혜왕 3)에 성균시에 합격한 후 보문각 대제학이 되었다. 재실은 조선시대 전기에 건립되었다고 하나 1960년에 해체 복원하였다. 재실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이다. 전면에 일각문을 두었다.
8. 충모재(忠慕齋)
유복립[1558-1593]의 제향을 받드는 제실이다. 본래는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에 퇴가 달려 있었으나, 1960년대 재실을 해체, 복원하면서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으로 확대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추녀는 암수막새로 마감하였다.
[누정]
용인시에 현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누정으로는 사은정(四隱亭)[향토유적 제50호]이 있다. 사은정은 조광조가 종형제인 이자 등과 친우를 맺고 노년의 생활을 즐기기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1796년(정조 20) 중건 이후로 수차례 중건을 하였으며, 1988년 후손들이 다시 중건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자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익공 팔작지붕 건물로 방과 대청을 좌우에 나란히 놓았으며, 전면에 개방된 툇간을 두고 난간을 설치하였다. 대청 안에는 중건, 중수기 현판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