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6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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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駒城面- |
영어음역 | Guseong-myeon Juldarigi |
영어의미역 | Dure Ssaum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놀이/놀이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성동 |
집필자 | 김호걸 |
[정의]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성동에서 정월 대보름날 행해지던 줄다리기.
[개설]
‘구성면 줄다리기’는 일제강점기까지도 근처 용인과 수원에서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인근에서 유명하였다고 한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전승이 중단되었다가 마을에서 불상사가 일어나자 줄다리기를 다시 시작한 점으로 미루어, 단순한 겨루기로서의 의미보다 풍농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세시의례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성면은 1931년에 읍삼면에서 구성면으로 바뀌었다가 2000년 구성읍으로 승격되었고, 2005년 기흥구 구성동으로 개편되었다.
[놀이도구 및 장소]
줄을 꼬는 데 필요한 짚은 집집마다 농사를 짓는 규모에 따라 갹출을 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집은 새끼를 꼬거나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줄다리기에 필요한 줄은 1~2일 전에 마당이 넓은 집에서 꼬았다. 줄다리기 도중에 줄이 끊어지면 낭패를 당하기 때문에 특별히 노년층이 지도를 하고 중·장년층이 꼬는 등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줄을 만드는 순서는 우선 짚으로 왼새끼를 꼬고, 나무 세 개를 엇받치게 세워 만든 걸침대를 이용하여 세 명이 계속 먹여치기로 돌아가면서 새끼를 다시 엮어 1m 정도의 굵기에 암수 각각 60~70m 길이로 만든다. 사람이 많을 때는 한쪽 줄에 3백 명 가량이 매달리기도 하였다. 개천 다리를 중심으로 남자인 북동은 숫줄을, 여자인 남동은 암줄을 준비하여 참나무로 만든 비녀목을 끼워서 결합하였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은 필요한 사람들이 잘라 가지고 가서 거름으로 사용하고, 매년 새 줄을 꼬아 줄다리기를 하였다. 놀이장소는 언남리에 속해 있던 남사면사무소 아래 지서 앞에 있는 다리에서 하였다. 남북을 흐르는 개천을 중심으로 북서쪽에 위치한 마북리(북동)와 남동쪽에 위치한 언남리(남동)로 편을 나누어 진행하였다.
[놀이방법]
줄이 완성되면 대보름날 저녁에 줄을 매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며 길놀이를 한다. 이때 풍물패들이 앞장서서 흥을 돋운다. 줄의 머리 부분에는 남색(신랑측)과 여색(신부측)이 각각 무등을 서는데, 여색은 노랑 저고리에 빨간 치마와 같이 색깔 있는 옷을 입었다. 길놀이가 끝나면 지서 앞에서 합수를 한 후 마당놀이를 벌인다. 풍물패들의 장단에 맞춰서 한바탕 멋들어지게 놀면서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다가, 달이 떠오르면 다리 위에서 남북동이 서로 머리를 맞대어 숫줄을 암줄에 집어넣고 참나무로 만든 비녀목을 끼워넣는다.
줄다리기는 세 판으로 승부가 결정되었다. 승부에 애착이 있게 마련이지만, 보통 첫째 판은 남자, 둘째 판은 여자, 셋째 판은 다시 남자가 이겼다. 다른 곳과 달리 남자 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당시에는 여자 쪽의 경사가 높았기 때문에 힘이 훨씬 더 들어 남자 쪽이 이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와 달리 어느 특정 마을이 이기면 보리, 또는 쌀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한바탕 술판과 놀이판이 벌어졌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줄다리기는 풍농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한편 집단 민속놀이로서 마을 내 주민간의 친목과 단결을 도모하는 등 현실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현황]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구성면 줄다리기는 전승이 끊겼다. 한때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계속되자 고속도로 공사로 인해 용머리가 끊기어서 그렇다는 말이 돌아 줄다리기를 다시 시작하였으나, 1979년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단절되었다. 남북동 청년들이 학교에 모여 ‘로프’로 줄을 당긴 적도 있으나, 동네 주민들은 짚으로 만든 줄로 하는 것이라야 제대로 된 줄다리기라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