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4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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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豊山小作人會 |
영어음역 | Pungsan Sojakinhoe |
영어의미역 | Pungsan Tenant Farmers' Un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강윤정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 있었던 농민 단체.
[설립목적]
풍산소작인회는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활동하는 소작인과 준소작인의 상호 부조와 생활 향상 등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변천]
풍산소작인회는 1920년대 전반기 농민운동의 효율적인 활동을 위해 이준태·권오설·김남수 등이 풍산학술강습회에서 만든 단체이다. 1923년 11월 11일 풍산학술강습회에서 회칙·결의·집행위원 등을 선출하고 조직되었다. 결성 장소는 권오설이 풍산학술강습회를 열고 있던 노동서사가 있는 풍천면 가곡리였다. 풍산소작인회는 출발 당시 회원이 2백여 명이었으나 1년 만인 1924년에는 5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에 풍산소작인회는 풍산 지역뿐만 아니라 안동군 내의 와룡·구담·괴정 지역 등에 출장소를 두게 되었다.
풍산소작인회는 1925년 들어 자신들의 회관을 건립하고 1925년 8월 28일에 낙성식을 하였다. 1925년 11월에는 풍서농민회를 독립시켰다. 조직이 확대되어 가면서 1925년 12월에는 예천군 하리면에 은풍(殷豊)출장소를 창립하였다. 1926년 10월에는 풍서농우회를 독립시켰다.
이처럼 풍산소작인회는 1920년대 중반까지 활발한 활동과 조직 확대를 보였다. 풍산소작인회의 확대 과정에서 주목되는 점은 중앙의 노동운동단체 및 공산주의 운동과 긴밀히 관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거듭되는 조선공산당사건과 그에 따른 지도그룹의 체포, 1930년 소작인회 간부들이 주도한 조선공산당 지방 조직의 발각 등을 거치면서 1930년대 후반에 이르면 회원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주요사업과 업무]
풍산소작인회는 안동 지역에서 소작 조건 개선운동과 봉건적 신분 질서 철폐운동 등을 주요사업으로 하였다.
[활동사항]
풍산소작인회는 1924년 봄 수확작물의 소작료 내리기운동을 시작으로 서울 지역의 노농운동단체와 연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에 가입하고, 여기에서 제시하는 소작률과 투쟁 방침에 맞추어 조직적으로 활동하였다. 소작농민들의 요구가 집단쟁의로 발전하자, 지주들은 일제의 협조를 받아 풍서농무회(豊西農務會)를 결성하고 탄압에 나섰다. 지주들의 강경한 대처에 풍산소작인회는 구속된 회원들과 소작권을 박탈당한 농민들을 돕는 데 적극 나섰다. 풍산소작인회의 이러한 활동은 소작쟁의를 지속하면서도 회원을 확대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립 이후 농민운동은 새로운 발전기로 접어들었다. 조선노농총동맹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으로 분리되는 움직임을 보이고, 농민조합이 결성되면서 대중운동이 강화되어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국 농민운동의 성격 변화에도 풍산소작인회는 소작인회의 명칭을 계속 사용하였다. 즉 안동 지역의 농민운동은 이후에도 소작운동이 중심을 이루었다는 말이 된다.
풍산소작인회는 정우회 선언이나 조선노농총동맹의 영향 아래 ‘실제 생활에 치중한 현실적 이익의 쟁취’라는 점을 투쟁방향으로 잡았다. 농민운동의 이러한 방향은 1926년 12월의 정기총회에서 그대로 결의되었다. 3,000여 명의 소작인이 풍산시장에 모여서 총회를 개최하여 당면사업을 결의하였는데, 새로운 소작대장의 작성, 농사개량과 부업장려 기관의 설치, 농촌 부인 및 농민 노동자의 교양 교육, 소작료의 인하, 지주의 지세 납부 등이 중심 내용이었다.
안동 지역에서는 사안에 따라 각 사회단체가 농민운동에 가담하여 연합투쟁을 벌였다. 대표적인 것은 1925년 11월에 전개된 도산서원 철폐운동이었다. 이 운동에 안동 지역의 전 사회운동단체들이 나섰다. 도산서원의 토지를 소작하는 농민이 소작료 납부 날짜를 어기다가 도산서원 측으로부터 구타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화성회가 제일 먼저 이 사건에 문제를 제기했고, 풍산소작인회·정광단·안동노우회·안동여성회·안동청년연맹 등이 연합하여 가세하였다. 이 운동은 도산서원으로 대표되는 봉건적 지배 질서에 대한 항쟁이었다. 또한, 1927년에 이르러 신간회 안동지회가 창립되자 풍산소작인회는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고, 많은 회원이 개인자격으로 가입하였다. 그리고 신간회 안동지회와 더불어 소작쟁의를 추진하였다.
[의의와 평가]
안동 지역의 농민운동은 유력 양반가문 출신이 앞장서서 소작쟁의라는 방법으로 일제와 일제에 연계된 지주를 공격하는 성향을 보였다. 유력 인사들이 앞장서 이끄는 바람에 안동 지역 농민운동은 노동운동과 마찬가지로 초기부터 매우 활발하였다. 풍산소작인회는 안동 지역의 대표적인 농민운동단체로서 서울 지역과의 연계성 속에서 농민들의 처우 개선에 앞장섰다. 또한, 안동 지역의 청년운동을 선도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까지 안동 전역을 이끌어 갈 군 단위의 농민조합을 결성하지 못했던 한계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