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130 |
---|---|
한자 | 豊山金氏 |
영어의미역 | Pungsan Gim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집필자 | 김복영 |
세거지 |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
---|---|
집성촌 |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
입향시기/연도 | 15세기 초 |
성씨시조 | 김문적(金文迪) |
입향시조 | 김자순(金子純) |
[정의]
김문적을 시조로 하고 김자순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안동시 세거 성씨.
[개설]
안동의 풍산김씨는 조선 초 김자순(金子純)이 왕자의 난을 피해 풍산현 오릉동에 정착한 후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형성된 가문이다.
[연원]
풍산김씨 시조 김문적(金文迪)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후손으로 고려 고종 때 나라에 공을 세워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고 풍산백(豊山伯)에 봉군되었다. 김문적의 손자 김연성(金鍊成)이 충열왕 때 문과에 올라 찬성사를 지내고 안동 풍산 오릉동(현 풍산읍 오미동)에 별장을 두었다. 그러나 후손들은 대대로 벼슬살이를 하면서 송도에 거주하다가 조선 개국과 함께 다시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입향경위]
김연성의 현손으로 병조판서를 지내던 김자양(金子良)이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죽자 김자양의 동생 김자순이 화를 피하여 선대의 별업이 있는 안동으로 내려와 오미동에 정착하고 은거하였다. 김자순의 손자 진산군수 김휘손(金徽孫)과 증손자 대사헌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楊震, 1467~1535)은 벼슬살이를 위해 다시 상경하여 한양에 살면서 자주 오미동을 내왕하였다.
김양진의 아들 유경당(幽敬堂) 김의정(金義貞)은 1516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지내고 1545년에 종부시첨정이 되었으나 그해 7월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인종이 세자일 때 세자시강원사서로 있으면서 깊은 학문적 신뢰와 예우를 받았던 까닭에 충격과 슬픔을 이기지 못해 병을 핑계대고 낙향하여 스스로 호를 잠암(潛庵)이라 고치고 아들 이름도 김농(金農)으로 작명하여 초야에 뭍일 뜻을 다졌다. 풍산김씨의 오미동 시대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의정의 손자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 1553~1602)은 생원시를 거쳐 산음현감이 되었는데 아들 8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첫째 학호(鶴湖) 김봉조(金奉祖, 1572~1630), 둘째 망와(忘窩) 김영조(金榮祖, 1577~1648), 다섯째 광록(廣麓) 김연조(金延祖, 1585~1613), 여섯째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1587~1668), 여덟째 설송(雪松) 김숭조(金崇祖, 1598~1632) 5형제는 문과에 급제하고, 셋째 김창조(金昌祖, 1581~1637), 넷째 김경조(金慶祖, 1583~164), 일곱째 김염조(金念祖) 3형제는 소과에 급제하여 8형제가 모두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5형제 문과 급제자가 나온 마을이라 하여 이때부터 오릉동(五陵洞)을 오미동(五美洞)이라 부르며 일약 명문세족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오미동의 풍산김씨는 대대로 학문과 벼슬이 이어졌고, 일제에 항거하여 일본 왕궁에 폭탄을 투척하고 감옥에서 생애를 마친 의사 추강(秋岡) 김지섭(金祉燮, 1884~1928)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김만수(金萬秀, 1894~1924), 죽포(竹圃) 김순흠(金舜欽, 1840~1908), 김재봉(金在鳳 1891~1944) 등 독립운동가도 배출하였다.
[현황]
현재 풍산읍 오미리에 김봉조, 김경조, 김숭조의 후손 60여 호가 세거하고 있으며, 김영조, 김창조, 김응조의 후손은 봉화 오록리에 세거하고 있다. 김연조의 후손은 예천 감천으로, 김염조는 재종숙인 좌참찬 둔곡(遁谷) 김수현(金壽賢)에게 입양되어 경기도 김포로 이거하여 살고 있다.
[관련유적]
풍산읍 오미리 뒷산에 김대현 9부자가 글을 읽던 죽암서당(竹岩書堂)이 있고 마을에 김대현이 살았던 안동 풍산김씨 종택, 영감댁(令監宅), 참봉댁(參奉宅) 등 고가옥, 위폐를 봉안한 추원사(追遠祠), 후손들이 강학하던 도림강당(道林講堂) 등이 있다.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에 김양진의 묘소와 묘제를 받들기 위해 지은 대지제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