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9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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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宗敎 |
영어의미역 | Religion |
분야 | 종교/신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집필자 | 김명자(민속) |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이루어지는 제반 신앙 행위의 총칭.
[개설]
종교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 모든 민족에게서 보이는 문화 현상이다. 종교는 정치·경제·사상·예술·과학 등 사회의 전 영역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 절대적이며 궁극적인 가치 체계로서 기능해 왔으며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경상북도 안동시는 의상의 화엄종과 퇴계의 성리학의 본거지로서 한국 전통 불교사상 및 유교사상과 관련이 많은 중요한 지역으로서 현재까지도 그 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구한말을 전후하여 유입된 그리스도교 계통의 종교 또한 융성하게 발전해오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불교]
1. 유입경로상의 안동불교(5~6세기)
안동 지역에 언제 불교가 전래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략적 추론은 가능하다. 삼국시대 당시 신라가 관할했던 안동 지역이 불교를 위시한 고구려 문화가 신라로 전파되는 경로 상에 위치하기는 했으나 그 사실을 토대로 신라가 공인도 하기 전에 이미 안동 지역에 불교가 먼저 전래되었다고 추론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당시 안동 지역의 경우 경주 지역의 지배세력만큼 불교 도입의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의 변방이었던 안동 지역으로의 불교 전파는 신라 지배 세력의 필요성에 의해 경주 지역에 먼저 전래되어 자리를 잡은 후에 서서히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당시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안동 지역의 주요 불교유물로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다. 이 보살상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예술적 완성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금동을 처리하는 기술도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 화엄종토착화 시기의 안동불교(7~9세기)
7세기 이후로 안동 지역은 신라의 변방이 아니라 신라의 확실한 내부 지역으로 신라의 수도인 경주 문화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그러나 7세기 중반 신라가 삼국을 병합한 이후로는 당나라의 최신 문화와 사상이 이 지역에 직통으로 전해지기도 하였다.
통일 직후 의상에 의해 당시의 최신 사상이었던 화엄종이 한국적으로 변용되어 영주 부석사를 중심으로 지역에 소개됨과 더불어 당나라의 신문화 일정부분 한국적으로 변용되면서 같이 전파·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부석사를 근거지로 하는 화엄종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8, 9세기경까지 안동 지역에서도 법흥사·법림사·법룡사·법상사 등이 창건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통일신라가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축하여 안정기에 접어든 9세기 후반~10세기에는 안동 지역의 불교가 다시 화려하게 꽃피던 통일신라 불교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시기 신라불교계는 화엄종과 유식 법상종이 주도권을 양분하고 있었는데 안동 지역은 화엄종의 외곽 근거지로서 화엄사상계열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9세기경의 화엄종은 부석사를 교두보로 한 의상의 화엄종뿐만 아니라 당나라 유학승에 의해 의상 이후에 발전한 중국 화엄종의 영향을 받은 화엄종이 경주(황룡사)를 구심점으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안동 지역의 불교는 비록 타 종파의 도전을 받고는 있었지만 종파적으로는 여전히 의상 화엄종의 영향 아래 있었다.
3. 나말여초 미륵신앙 토착화 시기의 안동불교(10~11세기)
나말여초 고려 건국에 일익을 담당했던 안동 지역은 위치상으로는 고려 내의 변방이었으나 고려문화의 개화에는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주요 관련 유물로는 10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제비원 미륵불이 있다. 제비원 미륵불은 신라의 예술 기법과 고려의 표현 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된 과도기의 문화유산으로 경주를 뒤로 하고 새롭게 부상하는 고려문화의 중심지인 개경을 향해 바라보고 있다.
또한 미륵신앙의 역사적 발전을 고려할 때, 제비원 미륵불은 신앙 계층의 변화 양상도 일정 부분 내포하고 있다. 진표의 미륵신앙에 들어 있는 불교의 토착화는 불교지도자의 민중지향적인 의도에 의한 토착화인데 비하여 이 시기의 미륵신앙은 민중 자체의 자연발생적 종교적 희망이 투영된 토착화라는 점에서 비교된다.
이러한 토착화는 정치적 혼동기를 겪으면서 철저히 소외받은 민중들이 기존 지배층에 대한 환멸과 더불어 새롭게 등장한 또 다른 지배층에도 기대지 미륵불신앙에서 직접적으로 구원 길을 찾으려는 경향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겉으로 드러나는 지배층의 귀족불교와 더불어 미륵신앙으로 대표되는 피지배층의 민중불교도 공존했던 것으로 보아, 고려 초의 안동불교는 고려불교의 한 축을 이끌어 가는 선도 역할을 한 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4. 고려 중기와 여말선초 시기의 안동불교(12~15세기)
고려가 원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원나라 불교의 직접적 영향을 받게 되었지만 안동불교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그 주된 이유는 안동 지역이 고려 화엄종의 주 활동 무대였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에 머무르다 환도한 후로 안동 지역에 대한 많은 특별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극락전을 비롯한 봉정사 유적이 이때 보수되어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 건물로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부석사 무량수전의 현판은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공민왕의 안동 피신은 고려 말에 안동 지역의 토호 세력이 더욱 활발하게 중앙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중앙으로 진출한 지방 출신의 신진 세력은 보수적인 귀족보다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다. 그들은 선진사상인 신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처음에는 타락한 귀족 중심의 지배 체제를 개혁하여 고려 왕실을 지키고자 했지만 그들의 입지가 강화되자 마침내 왕조 교체의 추진 세력이 되어 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안동 지역 출신의 신진사대부는 조선 초기 권력 중심부로의 진출에는 실패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큰 정치적 변동에도 불구하고 안동 지역의 불교는 큰 변화 없이 조선 초기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이나 이후 안동 지역이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의 본거지로 부상하면서 크게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유교]
안동 지역의 유교를 퇴계 이황과 주요 학파들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1. 이황
안동 유학의 선구자인 이황(1501~1570)은 경상도 예안에서 출생하였다. 풍기군수로 재직하는 등 관직에도 진출했으나 1555년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여 60세에 이르러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세우고 제자들과 함께 강학하며 일생을 보냈다. 이황의 철학은 정주의 학설을 따랐으며 이와 기는 결코 섞일 수 없는 이물이라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요약된다. 학문 탐구와 더불어 이황이 평생 힘쓴 사업은 서원을 창설하여 학풍을 진작시키고 사림파의 선현을 현창하는 사업이었다.
또한 만년에는 제자들과 함께 이황이 사는 고을인 예안에 역동서원을 창건하고, 가의도 하였는데 이곳은 안향의 제자로서 예안에서 만년을 지낸 우탁을 모신 곳이었다. 이후 예안과 안동 등 경상도 지역에 특히 많은 서원이 세워져 풍교가 진작된 것은 이황의 절대적인 영향이었다. 이와 같이 이황은 평생 학문에 전념하면서 수많은 문도들을 배출했으며 사후에 정리된 『문도록』에 의하면 문인의 수가 32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2. 영남학파의 학자들
이황의 후학들 중 주요 인물로는 김성일, 류성룡, 정구 등을 들 수 있다. 김성일과 류성룡은 안동에 뿌리를 둔 세족 출신으로 중앙에 진출하여 높은 직위에 올랐고, 제자들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후학이 끊이지 않았다. 경상도 성주 출신 학자 정구는 이황과 조식 양 문하에 모두 출입하였으나, 조식의 문인 정인홍과 불화하면서 이황의 연원에 더욱 친밀해지게 되었다.
류성룡의 학문은 김장생과 논변한 정경세에게 전수되었다. 정경세(1563~1633)는 인조반정 이후 영남의 남인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을 만큼 정치적으로도 비중이 있는 학자로서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다. 특히 예론에 밝았던 정경세의 학문은 류성룡의 아들 류진(柳袗)을 거쳐 류원지(柳元之)에까지 전해졌다.
류원지는 기해예송에 송시열의 예론을 반박하는 영남남인소(嶺南南人疏)가 있을 때, 그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학자였다. 류원지의 학문은 다시 정경세의 손자인 정도응에게 전해졌고, 이 학맥을 통해 근대에는 류심춘과 류주목이 배출되었다. 그들은 모두 류성룡의 후손들이었다. 류성룡의 학맥은 대체로 풍천의 하회와 상주를 중심으로 계승되었는데, 하회는 류성룡의 후손들이 세거했던 곳이고, 상주는 정경세와 류진의 후손들이 살았던 곳이다.
김성일의 학문은 장흥효(張興孝)를 거쳐 이휘일(李徽逸), 이현일(李玄逸) 형제에게 전해졌다. 장흥효와 이휘일은 일생을 처사로 지냈으나, 이현일(1627~1704)은 산림으로 국가의 초빙을 받아 숙종 초기에 일시 사환하여 이조판서에까지 올랐다. 이현일은 송시열이 이황의 학설에 대하여 맹렬히 공격했던 것에 대해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을 지어 율곡의 이기설을 축소 비판하였다. 이이의 성리설에 대한 이현일의 이와 같은 본격적인 비판은 영남 유학자로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360여 명에 달하는 문도들의 배출과 더불어 이현일의 학문은 아들인 이재(李栽, 1657~1730)에게로 이어졌다.
이재는 어려서부터 가학을 이어 독실하게 배우고 실천하였다. 부친과 달리 평생 포의로 지낸 이재의 이기사칠론은 부친으로부터 이어지는 퇴계학설의 계승이었으며, 이재의 학문은 다시 이상정(李象靖, 1711~1781)에게로 전해졌다. 이상정은 이재의 외손이었으며 이상정의 학문은 남한조(南漢朝)를 거쳐 류치명(柳致明)에게로, 류치명의 학문은 다시 김도화·김흥락에게로 전수되었다. 김흥락은 김성일의 후손이었으며 김성일에서 김흥락에 이르기까지의 학맥은 모두 안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지연이나 혈연으로 긴밀하게 연관이 되면서 모두 퇴계의 학설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3. 영남 퇴계학파의 전개와 종말
영남 지방에 큰 영향을 끼친 영남의 퇴계학파는 안동과 상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그 학맥이 꾸준히 계승되었다. 그들의 학문은 새로운 이론을 만들기보다는 퇴계학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천에 치중하였다. 다만 류치명의 문하에서 배운 이진상(李震相, 1818~1886) 경우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장하여 당시에 많은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진상이 세상을 떠난 뒤에 만들어진 문집은 도산서원에 의해 이단으로 배척되고 영남 일대의 유림들의 다수가 그 책을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영남학파의 학자들 중에는 구한말에 이르러 외적의 침탈에 대항하여 의병에 나서거나 해외로 망명한 이들이 많았다. 주요 인물로는 류치명의 문인인 김도화, 김홍락 문하의 이상룡, 김도화 문하의 류인식, 곽종석의 문인 김창숙 등이며 이들은 평생을 민족운동에 전념하였다. 따라서 이후로 전통적 방법으로의 유학의 전수는 더 이상 이루질 수 없게 되었다.
[천주교]
1914년 대구에서 천주교인 이윤구가 안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안동 천주교의 첫 교인이자 개척자가 되었다. 이윤구 가족은 일직면 귀미동 옹기굴에서 주일마다 미사를 행했다고 전해진다. 다음 해에는 이윤구의 사위인 박모씨가 역시 대구에서 이사를 오게 되면서 교인은 두 가구로 늘어났다. 그리고 1922년 이윤구의 집을 성당 관할 공소로 삼고 이윤구를 초대 공소회장으로 임명함으로서 안동 지역 천주교회의 첫 출발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24년 6월에는 율세동에 초가 3칸을 마련하여 초대 본당 신부로 서벨라도 신부가 부임했으며 이윤구의 아들인 이종교가 본당 회장으로 간택되었다. 그러나 첫 성탄 미사에서 화재가 일어나 성당이 소실되었으며 1929년에는 안막동으로 성당을 옮겼다.
안동본당의 설립으로 신자수가 급격히 늘고 교세가 확장되면서 인근 지역도 자극을 받아 본당 설립 준비를 서둘렀다. 이리하여 예천 지역에서도 성당이 새로 지어져 봉헌되면서 본당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도미니끄 신부가 본당신부로 임명되었다. 이후 해방과 더불어 적산 대지를 받아 현대식 벽돌 건물로 성당과 사제관, 수녀원 등을 신축했으며 1951년에는 김수환이 제5대 신부로 부임하였다.
1957년에는 파리 외방 전도회 감목대리구로 지정되어 외국인 신부 로제리오가 부임하여 십자가 모양의 성당을 개축하였다. 1969년 6월에는 교황 바오로 6세의 명에 의하여 종래 대구교구 관할이었던 경상북도 북부 지역이 안동교구로 분리 설정되어 안동에 교구청이 설치되었으며 초대 교구장으로 프랑스인 두봉 주교가 부임하였다.
또한 같은 해 10월에는 룩셈부르크에 있는 그리스도 교육수녀회 한국본원이 율세동에 설치되었다. 1973년에는 동부동본당이 분리되어 안동천주교회를 목성동성당으로 개칭했으며 사제관을 신축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멕시코에 있는 마리스타의 교육수사회 한국본원이 옥정동에 설치되었다. 1979년에는 태화동교회가 설치되었다.
[개신교]
안동 지역 최초의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회의 베아드이다. 1894년 부산을 거점으로 하고 선교의 방책을 세우기 위한 지역 답사로 안동을 거치게 되었다. 그 후 부산에서 대구로 옮겨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서 보낸 선교사들의 활약으로 1902년에 이르러 안동 지역에도 일직면 국곡리, 풍산읍 하리 등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1905년에는 와룡면 방잠마을에서 김성복을 중심으로 집회가 열렸는데, 이 방잠집회에 참여했던 교인들의 활약으로 예안 만촌, 녹전면의 방하, 녹래, 안흥, 와룡면 장수골, 영주 평은면 내매, 봉화 척곡 등지도 연이어 교회가 설립되었다.
1908년 8월에는 대구 주재 선교사 미국인 안의사 목사가 시내 대석동 기독서원에서 김병우, 강복영 모자 등 7명과 함께 첫 예배를 보았으며, 그 해 11월에는 강원도 원주 지역을 감리교파에 넘기면서 원주에 있던 북장로파 선교부를 철수하여 안동 지역에 설치하였다. 이 때 미국인 오웰목사와 김영옥 등이 안동에 정착하여 이듬해에 교회를 설립하고 1910년에는 선교부를 설치했으며, 김영옥이 안동교회의 초대 목사가 되었다.
이후 3·1운동을 기점으로 교세가 획기적으로 확장되면서 1921년에는 경상북도 북부 지역 장로교파의 연합체인 경안노회가 안동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1930년대에는 일본의 대륙침략정책으로 교회탄압이 가중되어 어려움에 시달렸으나 광복과 더불어 교세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3·1운동 이후 안동 교회사의 대표적인 지도자로는 이원영(李源永) 목사와 김광현(金光顯) 목사 두 사람을 들 수 있다. 이원영(李源永) 목사는 예안의 명문 출신으로 3·1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서 복역 중에 전도를 받았고, 출옥 후 평양신학대학을 나와 안동교회에서 시무하면서 사회계몽에 공헌하는 등 굳센 민족정신으로 끝까지 일제에 굽히지 않았다.
김광현(金光顯) 목사는 1934년에 안동교회에 부임하여 교계와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면서 일제에 대항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으나 해방으로 풀려났으며 해방 직후에는 고장 질서 유지와 국민사상 선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2009년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의 개신교 단체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과 신종교인 안식교, 통일교, 전도관, 구세군, 여호와의 증인 등 모두 10개 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