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5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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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鎭萬 |
영어공식명칭 | Kim Jinma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876년 8월 24일 - 김진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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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6년 9월 4일 - 김진만 대구권총사건 가담 |
활동 시기/일시 | 1917년 8월 - 김진만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형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33년 11월 20일 - 김진만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진만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남산동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
거주|이주지 | 남산동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재건 달성친목회 회원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진만(金鎭萬)[1876~1934]은 1876년 8월 24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항일 비밀결사 재건 달성친목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일명 대구권총사건에 가담하였다. 서화가로도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가계]
김진만의 본관은 분성(盆城)이다. 아버지는 김재양(金在穰)이고, 어머니는 이춘옥(李春玉)이다. 동생 김진우(金鎭瑀)도 대구권총사건에 가담하였다.
[활동 사항]
김진만은 1908년 계몽운동을 진작시킬 목적으로 결성되었다가 일제 강점으로 활동이 중단된 달성친목회 재건에 참여하였다. 재건 달성친목회는 1913년 2월 20일 결성되어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배일사상을 고취한다는 혐의로 일제 당국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다.
재건 달성친목회가 강제 해산된 뒤 김진만은 정운일(鄭雲馹)·김재열(金在烈)·최병규(崔丙圭)·최준명(崔俊明) 등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15년 4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대구의 부호 서창규(徐昌圭)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1월 무렵에는 대구의 부호인 정재학(鄭在學)·이장우(李章雨)·서우순(徐祐淳) 등에게 독립운동 자금 명목으로 각각 5만 원, 2만 원, 3만 원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으나 정재학 등은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김진만은 장인인 서우순이 첩의 집에 현금을 숨겨 놓았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숨겨 놓은 현금을 탈취할 작정을 하였다. 1916년 8월 김진만은 정운일·김재열·최병규·최준명·김진우·이시영(李始榮)·김재열(金在烈)·홍주일(洪宙一)을 비롯하여 대한광복회 회원이던 권국필(權國弼)·임병하(任炳夏)·서상준(徐相俊)[서우순의 아들]과 함께 서우순의 현금을 탈취할 구체적인 계획을 논의하였다.
1916년 9월 4일 김진만은 김진우·정운일·최병규 등과 함께 서상준의 도움을 받아 서우순이 자고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잠에서 깬 서우순이 비명을 지르고 집사 우도길이 달려오자 김진만 일행은 권총을 쏘며 달아났다. 이후 최병규가 남긴 신발이 단서가 되어 김진만을 비롯한 동지들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김진만은 1917년 8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8년 3개월 10일간 복역하였다. 1933년 11월 20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김진만의 작품으로는 「화훼십폭병풍」과 「기명절지」가 있으며, 1931년에는 ‘팔공산동화사적비’의 글씨를 썼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진만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