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3027
한자 崔丙圭
영어공식명칭 Choi Byeonggyu
이칭/별칭 최명숙(崔明淑)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1년연표보기 - 최병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3년 2월 20일 - 최병규 재건 달성친목회 결성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7년 - 최병규 대구권총사건 가담
활동 시기/일시 1917년 8월 - 최병규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형 언도
몰년 시기/일시 1931년연표보기 - 최병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최병규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계산동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1가·계산동2가지도보기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재건 달성친목회 회원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최병규(崔丙圭)[1881~1931]는 1881년 2월 26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에서 태어났다. 항일 비밀결사 재건 달성친목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일명 대구권총사건에 가담하였다. 최명숙(崔明淑)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가계]

최병규(崔丙圭)[1881~1931]는 1881년 대구 중구 계산동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최병규는 1913년 계몽운동을 진작시킬 목적으로 1908년 결성되었다가 일제 강점으로 활동이 중단된 달성친목회 재건에 참여하였다. 재건 달성친목회는 1913년 2월 20일 결성되어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배일사상을 고취한다는 혐의로 일제 당국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다.

재건 달성친목회가 강제 해산된 뒤 최병규정운일(鄭雲馹)·김재열(金在烈)·최준명(崔俊明) 등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15년 4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대구의 부호 서창규(徐昌圭)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 11월 무렵에는 대구의 부호인 정재학(鄭在學)·이장우(李章雨)·서우순(徐祐淳) 등에게 독립운동 자금 명목으로 각각 5만 원, 2만 원, 3만 원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으나 정재학 등은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최병규 등은 서우순의 사위인 김진만(金鎭萬)으로부터 서우순이 첩의 집에 현금을 숨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를 탈취할 작정을 하였다. 1916년 8월 최병규정운일·김재열·최준명·김진만·김진우(金鎭瑀)·이시영(李始榮)·김재열(金在烈)·홍주일(洪宙一)을 비롯하여 대한광복회 회원이던 권국필(權國弼)·임병하(任炳夏)·서상준(徐相俊)[서우순의 아들]과 함께 서우순의 현금을 탈취할 구체적인 계획을 논의하였다.

1916년 9월 4일 최병규정운일·김진우·김진만·권국필 등과 함께 담을 넘어 서우순이 자고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잠에서 깬 서우순이 비명을 지르고 집사 우도길이 달려오자 정운일 일행은 권총을 쏘며 달아났다. 이후 최병규가 남긴 신발이 단서가 되어 동지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최병규는 1917년 8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1년 2일 17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최병규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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