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3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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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俊明 |
영어공식명칭 | Choi Junmye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최준명(崔俊明)[?~?]은 대구 출신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일명 대구권총사건에 가담하였다.
[활동 사항]
최준명은 정운일(鄭雲馹)·김재열(金在烈)·최병규(崔丙圭) 등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15년 4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대구의 부호 서창규(徐昌圭)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1월 무렵에는 대구의 부호인 정재학(鄭在學)·이장우(李章雨)·서우순(徐祐淳)에게 독립운동 자금 명목으로 각각 5만 원, 2만 원, 3만 원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으나 정재학 등은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최준명 등은 서우순의 사위인 김진만(金鎭萬)으로부터 서우순이 첩의 집에 현금을 숨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를 탈취할 작정을 하였다. 1916년 8월 최준명은 정운일·김재열·최병규·김진만·김진우(金鎭瑀)·이시영(李始榮)·김재열(金在烈)·홍주일(洪宙一)을 비롯하여 대한광복회 회원이던 권국필(權國弼)·임병하(任炳夏)·서상준(徐相俊)[서우순의 아들]과 함께 서우순의 현금을 탈취할 구체적인 계획을 논의하였다.
1916년 9월 4일 최준명은 정운일·김진우·김진만·최병규 등과 함께 서상준의 도움을 받아 서우순이 자고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잠에서 깬 서우순이 비명을 지르고 집사 우도길이 달려오자 최준명 일행은 권총을 쏘며 달아났다. 이후 최병규가 남긴 신발이 단서가 되어 최준명을 비롯한 동지들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최준명은 1917년 8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최준명은 출소 후인 1920년 6월 홍주일·설태희 등과 조선교육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22년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의 제3회 정기총회에서 의사장을 맡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