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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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宗瑞 |
영어음역 | Gim Jongseo |
영어의미역 | Gim Jongseo |
이칭/별칭 | 국경,절재,충익,대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조선 전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이다. 할아버지는 지평 김태영(金台泳)이고, 아버지는 공주에서 도총제(都摠制)를 지낸 김추(金錘)이며, 어머니는 성주 배씨로 대사헌 배규(裵規)의 딸이다.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활동사항]
1405년(태종 5)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김종서(金宗瑞)[1383~1453]는 여러 관직을 두루 섭렵하며 자신의 입지를 탄탄하게 쌓기 시작하였다. 특히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1433년(세종 15)에는 함길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함길도관찰사로 있었던 7~8년간 북변에서 6진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장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당시 국경선은 현재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국경선과 거의 일치한다.
1445년(세종 27)에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3도의 도순찰사로 파견되어 삼남 지방에서 목마장이 적합한 곳과 방마(放馬)가 가능한 곳의 수를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좌찬성겸춘추관지사로서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편찬 책임을 맡아 진두지휘하였다. 또한 같은 해 『세종실록(世宗實錄)』의 편찬 책임관으로도 임명되었다.
단종 즉위 후 학문과 지략, 무인다운 기상을 겸비하여 선대왕의 신임까지 받았던 김종서의 권세는 당시 ‘대호(大虎)’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거세어졌다. 김종서의 권세는 조카의 왕위를 넘보던 수양대군에게 큰 걸림돌로 여겨져 결국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피살되었다.
[학문과 사상]
김종서는 6진 개척이라는 큰 공을 세워 무장으로 알기 쉬우나 『고려사』, 『고려사절요』, 『세종실록』의 편찬 책임을 맡아 진두지휘하였을 정도로 문인이자 학자였다. 이때 집필과 교열을 맡은 이들이 김종서 이외에도 모두 집현전 관료 출신들이거나 당대 최고 수준의 학자들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김종서의 학문적 능력이 대단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묘소]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 밤실에 있으며, 묘소의 전면에는 비석이 2기 자리하고 있다. 비에는 건립 사연을 적고 있는데 묘가 대교리에 자리하게 된 것은 원래 이곳이 김종서 집안의 세장지지(世葬之地: 대대로 묘를 쓰고 있는 땅)였으며 당시 마을 주민들에 의해 김종서의 묘소라고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인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 묘는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상훈과 추모]
1456년(세조 2) 공주시의 동학사 숙모전의 전신인 초혼각 동무에 가형 김종한(金宗漢)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1746년(영조 22) 복관되어 1758년(영조 34)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791년(정조 15) 강원도 영월군 장릉(長陵) 배식단(配食壇)에, 1797년(정조 21) 공주시 요당서원(蓼塘書院)에 배향되었고, 1808년(순조 8) 부조묘를 하사 받았다. 김종서의 묘소 앞에 김종서와 아들 김승규(金承珪)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정려(旌閭)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