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9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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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應晧 |
영어음역 | No Eungho |
영어의미역 | No Eungho |
이칭/별칭 | 시회,체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귀산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해준 |
성격 | 의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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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귀산리 |
성별 | 남 |
생년 | 1574년 |
몰년 | 1592년 |
본관 | 만경 |
[정의]
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만경(萬頃). 자는 시회(時晦), 호는 체헌(棣軒)이다. 공주의 만경노씨 입향조(入鄕祖) 노혁의 5대손으로 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를 지낸 노세득(盧世得)[1526~1589]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사항]
삼의사(三義士) 중 한 명인 노응호(盧應皓)[1574~1592]는 임진왜란 때에 조헌(趙憲)이 일으킨 의병을 따라 두 형과 함께 청주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조헌의 명으로 호서 지역의 군량을 모으기 위해 잠시 진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군량을 모아 금산으로 갔을 때는 이미 두 형을 비롯한 칠백의사가 모두 장렬하게 순절한 뒤였으므로 형들의 시신을 찾아와 고향에 안치하였다. 조정에서는노응호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전생서직장(典牲暑直長)의 관직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19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묘소]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반촌리 봉황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92년에 정려(旌閭)와 함께 승정원우부승지겸춘추관편수관(丞政院右府承旨兼春秋館編修官)에 증직(贈職)되었다. 삼의사는 1892년(고종 29)에 충청북도 보은군의 후율사(後栗祠)에 배향되었으며, 충청남도 금산군의 칠백의총 내(內) 종용사(從容祠)에도 배향되었다.
원래 공주시 우성면 귀산리에는 정려만 있었는데, 이들을 추모하고 배향할 사우가 없는 것을 아쉽게 여긴 공주의 유림과 후손들이 1978년에 80여 명이 연명으로 발의하여 ‘노씨삼의사사우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증을 받아 1979년 12월 19일에 삼의사의 생가 터를 충청남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받았다. 이를 계기로 1981년 ‘삼의사(三義祠)’라는 현판으로 사우(祠宇: 사당)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