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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970
한자 鄭雲慶
영어음역 Jeong Ungyeong
이칭/별칭 화백(和百),송운(松雲)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구완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1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894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896년 4월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05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939년연표보기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호좌의진 전군장

[정의]

개항기 제천 출신 호좌의진의 의병.

[가계]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화백(和百), 호는 송운(松雲).

[활동 사항]

정운경(鄭雲慶)[1861~1939]은 강한 재지(在地) 세력을 갖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재종순 정일원(鄭一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경제적으로는 빈한하여 영춘으로 이주하였으며, 관권이나 토호의 수탈로부터 농민들을 보호하려는 의협심을 내기도 하였다. 1894년(고종 31) 가을에는 허준(許焌) 등 동료 유생들과 함께 동학 농민군 지도자를 잡아 죽이고 근거지를 불태운 보수적인 유생이었다.

1895년(고종 32) 말 단발령 후, 제천을 중심으로 유인석(柳麟錫)을 지도자로 하는 의병이 일어났을 때 집안의 여러 인사들을 포함한 수백 명의 무리를 모아 의진에 나아갔다. 1896년 4월 홍대석(洪大錫)의 뒤를 이어 전군장이 되어 청풍 북창 일대를 방어하였으며, 뒤에는 원주 신림 쪽에서 관군을 막아 호좌의진에서 가장 믿음직한 장수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다.

제천 의병이 서울에서 내려온 관군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제천의 근거지를 잃고 서북쪽을 향하여 이동할 때 참여하였고, 서북쪽에서의 재기가 실패로 돌아가자 요동으로 건너갔으며, 위안스카이(袁世凱)의 힘을 빌리기 위하여 선양[瀋陽]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후 영춘 산골에 은거하면서 농민의 처지에 서서 부당한 관권에 대항하였고, 유인석의 지도에 따라 반외세적 성향의 향약 운동을 주도하였다. 1905년(고종 42) 원용팔(元容八)이 봉기할 때도 참여하였다. 원용팔이 체포된 이후 독자적으로 봉기하여 한때 단양을 장악하는 등 기세를 떨쳤으나, 곧 원주에 체포되어 미결수 상태로 1년 가까이 구금되어 있다가 15년 유배형을 받고 황해도의 외딴 섬 철도(鐵島)에서 2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다.

귀양지에서는 근방의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는 한편,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유배 온 황청일·김하규·이세영·전덕원 등과 의기투합하여 서로 어울리고 사직을 위해 몸을 던진 10명의 지사를 위해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로는 정병화·이강년(李康秊) 등의 의병장과 기맥을 통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은거하면서 문중을 이끄는 장로에 머물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송운집(松雲集)』, 『서도잡록(西道雜錄)』, 『동유록(東遊錄)』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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