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1038 |
---|---|
한자 | 元容正 |
영어음역 | Won Yongjeong |
이칭/별칭 | 치화(致和·穉和),서암(恕菴)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완회 |
[정의]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가계]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치화(致和·穉和), 호는 서암(恕菴). 의병 운동을 한 원용팔(元容八)이 육촌 동생이다.
[활동 사항]
원용정(元容正)[1860~1905]은 유인석(柳麟錫)의 제자이며, 유중교(柳重敎)가 강학하던 제천의 장담마을에 출입하면서 화서학파와 인연을 맺었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내려진 후 처신을 의논할 때 유인석과 함께 망명길에 오르려 하였으나, 이필희(李弼熙)가 이끄는 제천 의진이 출범하자 서기로서 종군하였다. 장회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의병이 흩어지자 안동에서 재기를 꾀하려 하였다.
유인석이 호좌의진을 건설하고 대장이 되자 대장 종사로서 유인석을 보좌하였다. 호좌의진이 영남의 의병론자들과 연합을 추진하기 위해 서상렬(徐相烈)을 영남 소토사(嶺南召討使)로 삼아 내려 보낼 때 그는 도총(都摠)으로서 수행하였다. 이때 영남 일곱 고을의 의병을 규합하여 맹약을 추진하면서 ‘역적의 편이 되지 말자, 중화의 제도를 변경하지 말자, 죽고 사는 것으로 마음을 변치 말자, 편의를 위하여 우왕좌왕하지 말자, 도적을 구경만 하고 나아가지 않는 짓을 하지 말자’는 내용의 맹약문을 지었다. 또한 의병에 협조하기를 머뭇거리는 예천 군수와 의성 군수를 죽였다. 그 후 일본군 병참이 있는 상주의 태봉을 공략하기 위한 작전에 참여하였다.
후에 제천 의진이 근거지인 제천을 관군에게 빼앗기고 서북 지방을 향하여 행군할 때 참여하였다. 유인석을 좇아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중국의 도움을 청하기 위하여 유치경(兪致敬)과 함께 선양[瀋陽]에 파견되었다. 문장이 뛰어나 의진에서 발표한 격문이나 상소문 중에는 그의 글이 많았다.
[저술 및 작품]
을미 의병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복은(卜隱)』을 비롯한 여러 의병 관련 저술을 집필하였고,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의 교정과 『의암유선생서행대략(毅菴柳先生西行大略)』의 편집에 참여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5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