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383 |
---|---|
한자 | 古墳 |
영어의미역 | ancient tomb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집필자 | 박중균 |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에 분포하고 있는 선사시대부터 고대에 조영된 무덤.
[개설]
고분(古墳)은 사전적 의미로는 옛무덤 혹은 고대에 만들어진 무덤을 말하며, 고고학에서는 개념을 한정하여 선사시대부터 삼국통일 이후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이 성행하고 고분축조가 쇠퇴한 시기까지의 무덤을 말한다. 고분은 무덤 자체의 양식 및 규모와 부장된 유물의 양상을 통해, 만들어진 당시의 정치·사회·문화에 관한 많은 정보를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고분은 역사 기록이 부족한 우리 고대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사에 있어서 국(國)의 형성과 발전, 사회 구조, 대외 교섭 등을 연구하는 데 주된 분석 대상이 되고 있다.
[형태]
충청북도 진천 지역의 고분으로는 청동기시대 고인돌, 마한의 움무덤[土壙墓], 신라 돌방무덤[石室墳] 및 돌덧널무덤[石槨墓] 등이 분포하고 있다. 진천 지역은 고대에 백제-고구려-신라로의 변천을 이루었지만, 아직 백제와 고구려의 고분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다만 삼덕리 고분이 백제 고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진천 지역의 선사시대부터 고대 고분의 양상과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청동기시대 고분은 고인돌이 대부분이며, 아직까지는 독무덤[甕棺墓]이나 돌덧널무덤 혹은 돌널무덤[石棺墓]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고인돌로는 용산리 고인돌을 비롯하여 10여 곳에서 26기 정도가 확인되었다. 분포 양상과 양식을 보면 주로 구릉상에 한두 기씩 독립적으로 분포하며, 바둑판식[남방식] 고인돌이 대부분이다.
[마한시대의 고분]
삼한 시기[원삼국시대]의 진천은 삼한 중 마한에 속하였다. 이 시기의 고분 유적으로는 진천 송두리 유적과 진천 신월리 유적이 있다. 진천 송두리 유적에서는 2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로 편년되는 움무덤 2기가 확인되었다. 무덤의 양식은 1호의 경우 무덤구덩이[墓壙] 내에 덧널[木槨]과 널[木棺]을 갖춘 나무덧널무덤[土壙木槨墓]이다. 유물은 덧널과 묘광벽 사이에 부장되었으며, 2호는 나무널무덤[木棺墓]으로 묘광 바닥의 중앙부에 유물 부장을 위한 요갱(腰坑)이 시설되어 있다.
요갱 시설은 창원 다호리, 경주 조양동 등 영남 지역의 삼한시기 토광묘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중서부 지역 마한의 토광묘에서는 아직까지는 확인되고 있지 않다. 부장 유물로는 손잡이 달린 긴 목 항아리[把手附長頸壺]·귀 달린 배 긴 독[兩耳附長胴甕]·주머니 호 등의 토기와 도끼[斧]·끌[鑿]·창[矛] 등의 철기류, 그리고 청동 고리[靑銅環]·8자형 동기(8字形銅器) 등이 출토되었다. 이들 부장 유물 중 토기와 청동제 유물은 영남 지역에서 확인되는 유물로, 중서부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이렇듯 진천 송두리 유적의 무덤은 무덤의 양식이나 부장 유물의 양상에서 중서부 내륙 지역에 있는 마한의 토광묘와 문화적 계통을 달리하고 있으며, 오히려 영남 지역의 토광묘 문화 요소를 보이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진천 신월리 유적은 진천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무덤구덩이 주위로 도랑을 돌린 주구토광묘(周溝土壙墓) 2기가 확인되었다. 주구토광묘는 중서부 마한 지역의 주된 무덤 양식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으며, 조영 시기는 대체로 2~4세기에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 양상의 고분]
백제 고분은 진천 지역에서 정식 보고된 것은 없지만 삼덕리 고분이 5세기 중·후반의 백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과 양식상 유사한 점이 많다. 삼덕리 고분은 연도[羨道]를 갖춘 전형적인 굴식돌방무덤으로, 무덤방의 평면 형태는 방형이며, 관대(棺臺)나 시상(屍床) 등의 시설이 확인되지 않았다. 연도는 우편재(右偏在)이며, 연도 앞쪽으로 길이 160㎝ 정도의 묘도(墓道)가 확인되었다.
[신라 양상의 고분]
진천 지역은 6세기 중엽 이후 신라가 진출하면서 신라에 의해 만노군(萬弩郡)이 설치되었던 지역으로, 대체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의 신라 고분이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신라고분으로 확인된 유적으로는 진천 송두리 유적, 진천 교성리 유적, 진천 교성리 남산골 유적, 진천 산수리 유적, 진천 죽현리 유적, 진천 내촌리 당골 유적, 진천 금곡리 모치울 유적 등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 확인된 신라 고분의 양상은 앞트기식 돌덧널무덤[橫口式石槨墓]이 일반적이며, 돌방무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신라 고분군이 확인된 대표적 유적인 진천 교성리 유적을 통하여 신라 고분의 양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진천 교성리 유적
진천 교성리 유적은 해발 150m 내외의 구릉 지역에 자리한 유적으로, 구릉의 사면에서 25기의 신라 무덤이 조사되었다. 이중 돌덧널무덤이 전체 25기 중 24기로 압도적인 수를 차지하며, 돌방무덤은 1기에 불과하다. 무덤의 조성 양식에 따라 구분하면 돌덧널무덤은 구덩식[竪穴式], 앞트기식[橫口式]으로 구분되며, 돌방무덤은 굴식[橫穴式]이다. 돌덧널무덤의 경우 앞트기식이 10기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며, 구덩식은 1기인데, 이외 13기는 앞트기식으로 추정되나 파괴가 심하여 불확실하다. 따라서 돌덧널무덤은 1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앞트기식돌덧널무덤에 해당한다.
1) 돌넛덜
돌덧널[石槨]의 바닥에는 할석이나 자갈, 혹은 이들 둘을 섞어 1~2겹 정도 깔아 관대(棺臺)나 시상(屍床)을 마련한 것이 대부분이며, 돌방무덤의 경우 시상대를 갖추고 있다.
2) 부장 유물
부장 유물은 토기류와 철기류로 구분되는데, 토기류가 종류도 다양하고 압도적인 수를 차지하고 있다. 토기의 기종을 보면, 뚜껑 있는 굽다리접시[有蓋高杯], 굽 달린 긴 목 항아리[臺附長頸壺], 사발[盌], 짧은 목 항아리[短頸壺], 굽 달린 사발[臺附盌], 굽 달린 항아리[臺附壺], 굽 달린 병[臺附倂], 병(甁), 뚜껑[蓋] 등이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기종은 굽다리접시와 뚜껑으로,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철기로는 낫[鐵鎌], 손칼[刀子], 띠꾸미개[銙板], 띠끝구미개[帶端金具] 등이 있다.
이들 출토 유물을 통해 볼 때 진천 교성리 유적의 무덤 조성 시기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신라가 보은·문의 지역과 충주 지역을 점령함과 동시에 진천 지역도 신라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