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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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現代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현석 |
성격 | 개념 용어(일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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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인물/단체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5년 8월 1일 - 인천시 문학 출장소, 인천시 주안 출장소 폐지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6년 10월 1일 - 인천시 문학 출장소 인천시 주안 출장소 부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6년 11월 23일 - 인천시 남부 출장소 인천시 남동 출장소 인천시 문학 출장소 인천시 주안 출장소로 분할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0년 4월 19일 - 현대 인천 공업 고등학교 학생들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수봉산 등지에서 침묵시위 전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0년 4월 20일 - 현대 인천 사범학교 학생들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일대에서 시가행진으로 경찰과 충돌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0년 4월 21일 - 현대 인하 공과 대학 학생들이 인천광역시 중구 답동 광장에서 4·19 혁명 희생자 위령식 후 시가행진 함 |
현 소재지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131-1 |
[정의]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 역사.
[개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1945년 8·15 해방 이후 인천부 남동 출장소, 인천부 문학 출장소, 인천부 주안 출장소 관할 하에 놓여 있었다. 1956년 11월 23일에 인천시 남부 출장소, 인천시 남동 출장소, 인천시 문학 출장소, 인천시 주안 출장소 관할로 다시 분할되었고, 1968년 1월 1일에 구제 실시와 함께 4개 출장소가 통합되면서 인천시 남구가 출범하였다.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 연수구가 신설됨에 따라 인천광역시 남구에 속해 있던 일부 동이 연수구에 속하게 되었다. 2018년 7월 1일부터 인천시 남구에서 미추홀구로 구 명칭이 변경되었고, 현재 7개 법정동과 21개 행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6·25전쟁과 미추홀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은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4일 북한군 제6 사단 제13 연대가 인천 지역을 점령하면서 북한군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인천 지역에 주둔한 북한군은 미처 피난가지 못하고 남아 있던 우익 인사들을 체포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소재 인천 소년 형무소에 수감시켰는데 당시 인천 소년 형무소에는 표양문 시장을 포함한 사상범 200여 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으로 유엔군과 국군 해병대가 인천 지역을 수복해 가자 북한군은 퇴각을 단행하며 인천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돼 있던 사상범 100여 명을 학살하였는데, 인천 소년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사상범들은 함포 사격으로 전화선이 두절되면서 북한군에 의한 학살을 면할 수 있었다. 1950년 9월 17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은 수복됐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해 이듬해인 1951년 1월 5일 또다시 북한군의 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한 달여 후인 1951년 2월 10일 인천 지역이 다시 수복되어 전후 재건 사업에 힘을 기울여 갔다.
[미추홀구의 민주화 운동]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4·19 혁명과 5·3 항쟁을 통해 민주화 운동의 경험을 축적해 갔다. 1960년 4월에 발생한 4·19 혁명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 학생 등이 참가해 자유당 정권을 붕괴시킨 민주주의 혁명으로 당시 인천 공업 고등학교, 인천 사범학교, 인하 대학교 학생 등이 시위를 주도하였다. 4월 19일에 인천 공업 고등학교 학생들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수봉산 등지에서 침묵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20일에 인천 사범학교 학생들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일대에서 시가행진을 벌여 경찰과 충돌하였다. 4월 21일에 인하 공과 대학 학생들이 인천광역시 중구 답동 광장에 모여 4·19 혁명 희생자 위령식을 개최한 후 시가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1960년 3월 15일에 시행된 정·부통령 선거의 부정을 규탄하고 민주주의를 외치며 궐기,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자유당 정권의 붕괴를 이끌어 냈다.
5·3 항쟁은 1986년 5월 3일에 신한 민주당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 옛 시민 회관 쉼터에 당시 소재해 있던 인천 시민 회관에서 ‘개헌 추진 인천·경기 지부 결성 대회’를 개최하려다 재야 세력 및 학생·시민 등의 시위로 인해 결성 대회가 무산된 사건이다. 당시 재야 세력 및 학생 운동 세력은 신한 민주당을 기회주의적 보수 야당으로 규정하고 결성 대회장인 인천 시민 회관 앞에서 ‘민주화 촉진 인천 시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대규모 집회를 이끌어 갔다. 이날 시위로 인해 129명이 구속되고 이후에도 정부의 대대적인 탄압과 검거 선풍이 계속 이어져 갔다. 5·3 항쟁은 1년 뒤에 일어난 1987년 6월 항쟁의 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추홀구의 출범과 발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은 1945년 광복 이후 인천부 남동 출장소, 인천부 문학 출장소, 인천부 주안 출장소 등 3개 출장소 관할 하에 있었다. 1949년 8월 15일에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라 인천부가 인천시로 개칭되었다. 1955년 8월 1일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을 관할하던 인천시 남동 출장소, 인천시 문학 출장소, 인천시 주안 출장소 중 인천시 문학 출장소와 인천시 주안 출장소가 ‘인천시 조례 제128호’에 의해 폐지되었다가, 1956년 10월 1일에 ‘인천시 조례 제143호’에 의거해 다시 부활하였다. 곧이어 1956년 11월 23일에 ‘인천시 조례 제144호’로 인천시 남부 출장소, 인천시 남동 출장소, 인천시 문학 출장소, 인천시 주안 출장소로 분할·관리되다가 1968년 1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위의 4개 출장소가 통합하면서 인천시 남구가 출범하였다.
1981년 7월 1일에 인천시가 인천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 인천직할시 남구가 되었다. 1988년 1월 1일에 인천직할시 남동구가 신설되면서 인천직할시 남구에 있던 13개 동이 분리·편입되어 총 27개 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1995년 1월 1일에 인천직할시가 광역시로 승격됨에 따라 인천광역시 남구가 되었으며 1995년 3월 1일에 인천광역시 연수구가 신설되어 분리·독립하였다.
2009년 2월 1일, 인천광역시 남구 숭의 1동과 인천광역시 남구 숭의 3동을 인천광역시 남구 숭의 1․3동으로 통합하고, 인천광역시 남구 용현 1동과 인천광역시 남구 용현 4동을 인천광역시 남구 용현 1․4동으로, 인천광역시 남구 도화 2동과 인천광역시 남구 도화 3동을 인천광역시 남구 도화 2․3동으로 통합하여 7개 법정동과 21개 행정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2018년 3월 20일 법률 제15499호로 「인천광역시 남구 명칭 변경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어 동년 7월 1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출범하였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2018년 9월 말 현재 총인구 41만 7780명으로 남자가 21만 705명, 여자가 20만 7175명이며, 그중 외국인은 8,832명이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총면적은 24.85㎢이며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 소재지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독정이로 95[숭의동 131-1]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