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1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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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舞踊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금향 |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행해지는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행동을 통해 감정·정경·상황 등을 표현하는 예술 활동.
[변천]
인천 지역에서 무용 활동이 지속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인천 지역 무용의 정체성을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인천이 독자적인 도시로서 그 역사가 길지 않다는 점과 서울이라는 한국 문화의 중심 도시에 인접한 위성 도시라는 점을 들 수 있다.
개항 이후 일제 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인천에는 자체의 근대적 무용 예술 활동이 전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60년대 이후에야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서울과 타 지역에서 활동하는 인천 출신 무용인들이 적지 않은 데 비해서 인천에서는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인천 시립 무용단의 공연이 대종을 이루고 전문 단체 활동도 극소수에 머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인천 무용의 역사를 조명해 본다면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의 인천 무용은 교육과 공연으로 대별된다. 이 시기에 인천에서 조직된 무용 공연단체는 없는 것으로 보아 1920년대와 1930년대 인천 공연은 타 지역 무용인의 공연으로 보이며, 1910년을 전후하여 인천의 몇몇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서 율동과 유희를 가르쳤다.
1895년 한국에서 신학교(新學校) 체제의 학교들이 설립된 이래 1906년 ‘보통학교령’ 공포, 1908년 ‘고등 여학교령’에서 체제 교과에 유희를 포함시켜 공교육에 무용 교육이 시작되었고, 1914년 학교에서 독립된 유희 교과인 무용 교육을 가르치게 되었다. 인천에서는 영화 여자 보통학교[1892년 개교, 영화 초등학교 전신], 박문 보통학교[1900년 개교, 인천 박문 초등학교 전신], 인천 공립 보통학교[1907년 개교, 창영 초등학교 전신]에서 율동과 유희를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후 학교 교과 내에서 유희와 무용이 존속하였으므로 인천에서 율동 형식의 무용 교육이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인천에서 최초의 무도와 신무용 공연은 1922년 6월 천도교 소년 가극 무도반(天道敎少年歌劇舞蹈班)의 초빙 공연[『매일 신보』 보도]이며, 이어서 1923년 5월 인천 월미도에서 ‘대원유회(大園遊會)’가 열렸고, 1924년 8월 굴업도에서는 ‘음악 무도회’[『동아 일보』 보도], 10월 ‘동양 어린이 음악 대회’[『매일 신보』 보도], 1926년 3월 인천 여청 주최 ‘음악 무도회’가 열렸었다. 1926년 8월 아마추어 수준이긴 하지만 인천에서 음악 무도 대회가 개최되고 연이어 10월에도 음악 무도 대회가 열리는데, 10월의 음악 무도 대회에서는 한국 근대 춤의 개척자인 조택원과 박칠의 독무, 조택원과 김영순의 2인무 등 2편의 춤이 선보였다. 1930년대 인천에서 신무용 공연을 한 배구자[1905~2003] 1931년 1월에 경성에 이어 인천 애관에서 4일간 연 공연은 인천 최초의 신무용 공연이자 예술 무용 공연이다. 한편 인천에서의 마지막 신무용 공연은 조택원의 공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일제 강점기에 인천에서의 신무용 공연은 두어 차례 있었을 뿐으로, 인천에 자극이나 영향을 줄 만한 무용인이 없었을 정도로 인천의 춤 토대는 미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해방 직후]
해방 직후부터 인천에서는 주로 서울 무용인들의 공연이 자주 공연되었는데 주로 애관에서의 공연이 많았다. 1947년경에 인천 여자 중학교와 신흥 초등학교 등에서 무용 교육과 체육 교육을 별도로 운영하며 전문 무용 교사에게 교육을 맡긴 것은 전국 최초의 일이자 인천의 춤 기반을 닦은 작업이라 할 수 있다. 1950년 6·25 전쟁 이후, 인천 인근의 민속 예술인들이 북한에서 내려와 인천에서 정착하였는데, ‘이왕직 아악부’ 출신인 민천식[1898~1967]은 인천 국악원장을 역임했고, 봉산 탈춤의 양소운[1924~2008]도 인천에 정착하는 등 인천이 황해 및 서해 문화권의 민속춤과 생활춤을 포용할 만한 계기를 열어 놓은 것으로서 그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태동기(1960~1970년대)]
1960년대에도 인천에서는 아동 및 초등학교 무용 전문 교육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민천식, 이명미, 이춘옥, 김매자, 이명숙, 이영희 등 다수의 사설 무용 학원이 운영되어 춤 인구와 작품 창작의 저변 확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호응하여 1962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있던 인천 교육 대학[현 경인 교육 대학교]이 무용반을 구성하였다. 1972년에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에 있었던 인천 전문 대학에 무용과가 설치되었다. 또한 1962년 인천 신문[현 경인 일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소재]은 무용 콩쿠르를 창설하여 10회까지 매년 개최하였고, 1964년에 동아 일보 주최의 동아 무용 콩쿠르가 창설되었다.
한편, 한국 무용 협회 경기도 지부[지부장 김중흠]는 무용 전공자 및 초등·중등 교사 70여 명으로 1967년 2월 25일에 창립되었으나 구성원의 비전문성으로 유명무실하다가 1969년에 최청을 지부장으로 하여 재설립되었다. 하지만 재정난으로 1978년에 지부장 문정옥으로 개편하여, 1980년 제1회 경기 예술제[무용제]를 준비하면서 실질적 작업이 가능한 이선주가 부지부장이 되었다.
[형성 및 발전기(1980~1990년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천에 실체적 무용계가 형성되었다. 첫째는 무용 교육, 한국 무용, 외국 무용의 기류가 조성되어 교육에는 문정옥·이운철, 한국 무용에는 이선주·이영희·박순자·이명자·이명신·이춘옥·장기영, 외국 무용에는 이운철·정숙경·김경숙·이영애·김명순·이보애 등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는 1981년에 이영희 상임 안무자를 중심으로 30명 규모의 인천 시립 무용단이 탄생한 것이다. 셋째로 한국 무용 협회 인천직할시 지부가 지부장 이선주를 주축으로 부지부장 이명신·이춘옥으로 새롭게 출범한 것이다.
(1) 한국 무용 협회 인천직할시 지부의 설립
1982년에 한국 무용 협회 인천직할시 지부[현재 한국 무용 협회 인천광역시 지회,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인천 문화 회관 내]가 창립되어 인천직할시 예술제를 범인천 무용계 행사로 끌어올리면서 높은 수준의 공연을 하였다. 이어 전통 무용의 대가 11명을 초청하였고, 1983 마당놀이로 국가무형문화재 강령 탈춤, 청소년들을 위한 농악 강습회, 개항 100주년 기념 발레 「옛이야기들」, 현대 무용 「영겁」, 풍물놀이·꼭두각시놀음·은율 탈춤·경신 역마 놀이로 엮어진 4시간 춤판, 무용제의 「거상춤」, 1984년에는 「북성포 풍어 놀이」를 발굴하였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추진되면서 무용과 문화 예술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자 인천 시립 무용단의 지속적인 정기 공연과 한국 무용 협회 인천직할시 지부의 다양한 행사들이 서울 지역 무용인들과 합동 창작 공연으로 개최되는 등 국내 무용계의 양적 성장과 더불어 인천 무용계도 성장을 하게 되었다. 그 외에 인천 시민의 날 경축, 제물포 예술제, 서울 올림픽 성화 맞이, 전국 민속 예술 경연 대회 등을 주최·주관·출연하였으며, 해주 검무 발표회를 후원 출연하고, 월미 축제를 만들어 「곶장굿」과 「인천 근해 갯가 노래」·「뱃노래」를 재현했으며, 새싹 춤 잔치를 새로 만들었다.
(2) 인천 시립 무용단
인천 시립 무용단은 인천 무용계 형성의 결정적 요인으로, 한국 전통 무용의 전승 및 재창조와 무용 창작 활성화를 목표로 1981년 4월 1일에 창단되었다. 이영희 초대 상임 안무자는 「굴레야 굴레야」·「인천 말뚝이」·「마당풀이」·「2천 년대를 향하여」 등으로 무용단의 기초를 확고하게 했다. 1987년, 민태금 제2대 상임 안무자는 「나르시스의 창」·「몇 개의 움직임」·「빛의 도시」·「창 안, 창 밖」 등을 선보이고, 일본 북규슈 공연을 통해 한국 무용과 인천을 알렸다. 1991년 이청자 제3대 상임 안무자는 「장대에 걸린 달」·「누가 채송화 꽃밭을」·「청산녹수」 등 창작과 전통을 올리고, 미국·캐나다·일본·브라질·헝가리·터키·폴란드·포르투갈·멕시코·중국 등에서 전통 무용으로 현지인과 해외 교민의 호응을 받았다. 1997년, 김영숙 제4대 예술 감독은 「나비의 꿈」·「하늘의 소리」·「하늘 땅 바다」 등 궁중 무용의 장중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선보이고, 지역 민요 「나나니 타령」에 맞추어 「나나니춤」을 정형화하였다. 무용 교실, 청소년을 위한 무용제, 인천 지역 초등·중등 교사 대상 한국 무용 및 장단의 이론과 실기 교육, 문화 인천 시민을 위한 ‘춤 마당·흥 마당’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3) 인천의 무용단과 활동
이은주 무용단은 1979년 12월에 창단하여 인천 무용제, 인천 춤 길 등에서 공연하였고, 인천 현대 무용단[대표 정숙경]은 1988년 1월 1일에 창단하여 대한민국 무용제에서 「저녁 강」 등을 공연하였다. 인천 무용단·새싹 무용단[대표 이명신]은 1988년 6월 1일에 창단하여 성인 무용과 어린이 청소년을 망라하는 많은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그 외에 김경숙 현대무용단은 1988년에 무용단을 창단하였고, 흥사단 천사 무용단[대표 신영자]는 1990년에 창단한 뒤, 1996년 5월에 신영자 발레단으로 재창단하였다. 안무가로 활약하던 홍선미의 현대 무용단은 1997년 창단하였고, 김현숙 현대 무용단, 김희진 현대 무용단-VIBE, 조순분 무용단, 미추홀 무용단[장정아] 등 다수의 무용단이 창단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4) 인천 안무가 협회의 창립과 활동
인천 안무가 협회[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인천 문화 회관 내]는 인천의 무용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이은주 회장을 비롯해서 인천 안무가들이 모여 1996년에 창립했다. 인천 안무가 협회는 1996년에 시작해서 2000년까지 해마다 7명의 안무가가 7개의 작품을 문예 회관 소극장에서 공연하여 무용 발전에 기여하고, 청소년을 위한 5월 무용제는 1998년에 시작해서 2000년 현재까지 인천 종합 문화 예술 회관 야외무대를 활용해서 해마다 현대 무용, 발레, 한국 무용을 공연하였다. 1998년부터는 세미나를 개최하여 지역 문화 활성화를 위한 예술인의 과제와 인천 문화 예술인의 역할에 대해 이론과 실기 면에서의 실천 방안을 이끌어내고 있다. 1999년부터는 유치부에서 일반부까지 참여하는 비류 무용 콩쿠르를 개최하였다.
[21세기의 인천 무용]
2000년대에 인천에서는 한 해에 30~40회의 무용 공연이 열렸으며, 인천 시립 무용단이 공연작에서 무대 충실도를 높여 시민과의 접촉을 다변화하고 다수의 전문 무용수가 상주하는 등 인천 무용에 대해 견실한 토대 역할을 하고 있다. 그와 더불어 이은주, 김희진, 김현숙, 장구보, 김주성이 인천에서 꾸준히 공연을 펼치고 있어 개인 창작 활동에 자극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소재하고 있는 한국 무용 협회 인천광역시 지회는 ‘미추홀 현대 무용제’, ‘인천 춤 길’, ‘인천 무용제’와 같은 행사를 개최하여 인천의 무용 활성화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인천 무용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한편 2004년부터 격년제로 열리는 ‘인다비(INDABI)[인천 댄스 비엔날레: INcheon DAnce BIennale]’는 인천에서 유일한 정례 국제 춤 제전으로 국내외 작품들을 소개함으로써 지역 관객의 무용 안목을 일신시키고 인천 무용의 지평을 해외로 넓히는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