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11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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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宗家 |
영어공식명칭 | Head Family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덕묵 |
[정의]
경기도 시흥 지역에서 여러 대에 걸쳐 분가를 한 경우에 분가의 본가.
[개설]
종가(宗家)는 대종가와 소종가로 구분한다. 대종가는 성씨의 시조로부터 장자로만 이어진다. 소종가는 대종가에서 중시조를 기점으로 파생된 종가로서 불천위(不遷位)[나라에 큰 공훈을 남기고 죽은 사람의 신주(神主)는 오대봉사(五代奉祀)가 지난 뒤에도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 조상인 중시조를 모신다. 임금으로부터 시호(諡號)를 받거나 문묘에 배향되는 등 중시조의 인물이 출중하면 조정에서 불천위 또는 부조(不祧)로 정하여 독립적으로 가계를 이어 가도록 허용하여 소종가가 생긴다. 시흥 지역의 대표적인 종가는 반남 박씨(潘南朴氏) 오창(梧窓) 종가, 청주 한씨(淸州韓氏) 문익공(文翼公) 종가, 덕수 장씨(德水張氏) 계곡(溪谷) 종가이다.
[반남 박씨 오창 종가]
시흥 지역의 세거 성씨 중 하나인 반남 박씨 오창공파의 분파조(分派祖) 박동량(朴東亮)[1569~1635]은 조선 중기 문신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호조와 병조의 좌랑(佐郞)을 역임하였으며 묘소는 군자봉 동쪽 기슭에 있다.
반남 박씨 오창 종가는 조선시대에는 서울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시흥 지역으로 내려와서 박동량 묘소 우측에 자리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종택이 모두 불에 탔고, 2012년 묘소 좌측에 신축하였다. 6.25전쟁 전에는 충익공(忠翼公) 박동량과 박동량의 아들 박미(朴彌)[1592~1645]의 불천위 제사를 지냈다. 박미는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결혼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진 인물이다. 인민군이 점령했을 때에는 급히 피난을 하면서 조상들의 신주를 산소 앞에 묻었는데, 전쟁으로 종가와 사당이 모두 불에 탄 후로는 불천위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2015년 사당을 신축하였으나 현재 신주를 모시지는 않았으며 이곳에서 시제(時祭)를 지내고 있다. 군자봉 기슭에 임금이 내려 준 15만 평[약 0.5㎢]의 사패지(賜牌地)가 있었으나 현재 10만 평[약 0.33㎢]이 남았다. 2018년 현재 종손은 16대손 박만춘이다. 이 집안은 박동량 이래로 33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명문가이다.
종가의 음식 문화로 백김치와 신선로가 전승되어 예전에는 손님 접대 음식으로 사용되었다. 종가에서 담근 가양주(家釀酒)는 단절되었으나 근래에는 종부(宗婦)가 배워서 제를 지낼 때 담가 사용하고 있다. 종가에는 300여 년 전부터 전승되는 『제례도식(祭禮圖式)』[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이라는 책이 있어 이 책을 기초로 하여 제물(祭物)을 차리고 있다. 보물 제1724호인 박사익 초상(朴師益肖像) 등 서화류 10점과 경부(經部), 사부(史部), 자부(子部), 집부(集部) 등의 각종 고서도 2012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증하였으며 경기도박물관에도 일부 자료가 기증되었다.
원래 종가에 남아 있던 책은 6.25전쟁으로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자료는 흥선 대원군의 손주며느리인 16대손 박만춘의 증조모(曾祖母)가 운현궁(雲峴宮)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군자봉 기슭의 선산에는 박동량 선생 묘 및 신도비와 박미 묘가 있다. 이곳 선산에는 역대 종손들만 묻힐 수 있도록 가문에서 규정하여 종손들의 묘소가 있다. 종손 중 한 사람은 부득이한 사유로 개성특급시에 묻혀 있다고 한다. 매년 산소에서 시제를 지냈으나 2015년 이후로 사당에서 시제를 지내고 있다.
[청주 한씨 문익공 종가]
시흥시 거모동의 세거 성씨인 청주 한씨 문익공파 한준겸(韓浚謙)[1557~1627]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1579년(선조 12) 성균관 생원시, 진사시에 모두 장원으로 입격(入格)하였다. 1585년(선조 18)에 태릉참봉에 제수되고, 이듬해 문관에 급제하고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어 홍문록(弘文錄)에 올라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1589년(선조 22) 금천현감이 되었는데 선조가 그에게 노모가 있음을 알고 사가독서(賜暇讀書)[조선시대에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하게 하였다. 이후 함경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 호조판서, 대사헌, 한성부판윤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1623년(인조 1)에 인조반정으로 딸이 인열왕후(仁烈王后)로 책봉되자 보국숭록대부 영돈령부사(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졌다. 1627년(인조 5) 7월 17일 사망하였다.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익(文翼)으로 내려졌다.
한준겸 묘와 신도비는 종가 뒤 영동고속도로 군자 요금소[TG] 부근에 있다. 그곳에 한준겸 묘와 신도비 및 그 후손들의 묘가 산재해 있다. 청주 한씨 문익공 종가는 시흥시 거모동에 있다. 2018년 현재 14대 종손은 한걸태이다. 종택은 1996년에 신축하였다. 재실(齋室)은 종가 뒤에 있으며 1996년 종가를 지을 때 신축하였다. 한준겸의 불천위 제사는 음력 7월 17일 낮에 지내고 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가 광복 후 이 댁을 방문하여 '충효가정(忠孝家庭)'이라는 글씨를 써 주었는데 그것을 가훈으로 삼고 있다. 14대 종손 한걸태의 모친[1988년 90세로 작고]은 집에서 담근 가양주로 손님 접대도 하고 제주(祭酒)로 사용하였으나, 이후 비법이 단절되었다. 지금은 정종을 사서 제례를 지낸다. 이 집안은 남인이라 홍동백서(紅東白西)로 제물을 진설(陳設)한다.
[덕수 장씨 계곡 종가]
시흥시 조남동의 세거 성씨인 덕수 장씨 계곡 장유(張維)[1587~1638]는 우의정 김상용(金尙容)[1561~1637]의 사위이며 조선 제17대 왕 효종의 비(妃)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다. 1605년(선조 38)에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에 증광문과(增廣文科)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공조판서로서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강화론을 주장했으며 이듬해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상으로 끝내 사직했고 장례 후 과로로 죽었다. 많은 저서가 있었으나 정묘호란 때 거의 분실되고 『계곡집(谿谷集)』, 『계곡만필(谿谷漫筆)』, 『음부경주해(陰符經注解)』가 전해진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졌고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장유의 종택과 사당은 시흥시 조남동에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모두 불에 탔다. 현재 종손은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거주하고 있으며 장유의 불천위제는 음력 3월 16일 저녁 10시경에 종손이 거주하는 아파트에서 행해진다. 장유의 영정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계곡집』, 『계곡만필』, 『정사공신록(靖社功臣錄)』, 교지류(敎旨類) 등 10여 점의 고서 및 문서는 종손이 소유하고 있다. 장유 선생 묘 및 신도비는 조남동에 있으며 선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장유와 장유의 아버지 장운익(張雲翼)[1561~1599]의 신도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