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32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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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西里- |
영어의미역 | Seori Village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서리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형분 |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유래]
국사당 앞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당앞이라고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부터 서리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형성 및 변천]
서리마을이 속한 지산리(芝山里)는 인근 영취산(靈鷲山)이 남으로 뻗어 내린 여러 능선 중 산 밖 등(큰 산 바깥의 등) 능선에 위치한 지산(芝山), 평산(平山), 서리(西里)마을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이 마을은 통도사(通度寺) 창건이래 사하촌의 역할을 해온 마을이며, 중심 마을은 평산(平山)마을이었다. ‘지산(芝山)’이라는 명칭은 진시황제의 신하 서복(徐福)이 이곳에서 불로초를 구했다고 하여 부쳐진 이름이라고 한다. 1914년에 평탄한 산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하여 ‘평산(平山)’ 이라 이름하여 졌다고 한다. 서리(西里)마을은 1914년 이전까지는 초산리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산리에 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리마을 및 지산리 지역에 사람이 처음 주거를 형성한 시기에 대한 구전 및 문헌적 자료가 전하지 않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구전으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인근 순지리 지역에 7세기 중엽쯤에 김장자라고 하는 사람이 지금의 신평(新坪)에 살았는데 그의 아들이 어사(御使)가 되었다고 하여 “어사촌(御使村)”이라 칭하여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를 토대로 통도사가 창건시기인 7세기 중엽부터 사람이 거주 해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인근 방기리 및 신평유적에서 청동기유적이 발굴되어 짐에 따라 최초 거주시기는 더 올라갈 수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지산리 인근에 처음으로 입촌한 사람은 김해 김씨(金海 金氏)로 알려져 있는데, 지산당(芝山堂) 앞에 있는 그 묘의 입석에 ‘장사랑(종 9품의 문관 벼슬) 김해김공함풍10년(將仕郞 金海金公咸豊十年)’이라고 씌여 있는 것으로 보아 대략 1800년경으로 추산된다. 이후 1850년경에 남원 양씨(南原 楊氏)가 인근 ‘독작골’ 에 들어와서 살았다고도 전한다. 그러나 현재는 이 곳에 사람의 거주 흔적만 있을 뿐 사람이 거주하지는 않는다.
[자연환경]
마을 인근에는 통도사와 영축산이 위치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양산천이 흐르고 있다. 특히 통도사 안으로 이어지는 계곡과 도로 주위에는 울창한 송림이 조성되어 있어 마을 주민들은 물론이고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훌륭한 볼거리와 휴식처를 제공해주고 있다. 또한 마을 서쪽에 위치한 영축산은 사계절 내내 그 모습을 달리하여 주민들에게 훌륭한 조망을 제공해주고 있기도 하다. 경부고속도를 타고 언양방면으로 진행하다보면 통도사IC를 만날 수 있다. 이 곳에서 양산방면으로 빠져나오면 국도 35호선을 만날 수 있는데, 이 국도를 타고 통도사 방면으로 진행하다가 보면 통도환타지아 사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우회전 한 후에 통도환타지아 정문 방면으로 진행하다가 보면 정면에 마을이 보인다.
[현황]
2008년 6월 현재 총 285가구에 772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서리마을 앞에 통도사가 있는데, 통도사가 관광지로 발전하면서 농업에 종사하던 주민 대부분이 서비스 관련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서리마을 입구에는 초원타워 3차 아파트가 조성되어 있으며, 마을 동쪽으로는 지내마을과 통도환타지아가 있다.
서리마을 뒷산에는 국사당이 있다. 이 국사당은 원래 통도사 내의 여의주봉(무풍교 서남쪽 봉우리)에 있었으며, 통도사 내에 있을 때는 매년 정월 14일 밤에 통도사에서 제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서리마을 뒷산으로 이전한 후에는 주민들이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마을 사람 중에 깨끗한 사람을 뽑아 제를 지내고 있다. 또한 양산시에서도 매년 8월 14일에 제를 올리고 있다. 국사당에는 국사할아버지와 산신을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