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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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山金氏 |
영어의미역 | Gwangsan Gim Clan |
이칭/별칭 | 광김(光金)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집필자 | 김복영 |
세거지 |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안동시 풍천면 구담리|안동시 와룡면 가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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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 |
입향시기/연도 | 14세기 초(예안파)|15세기 말(구담파) |
성씨시조 | 김흥광(金興光) |
입향시조 | 김무(金務, 예안파)|김용석(金用石, 1453~?, 구담파) |
[정의]
김흥광을 시조로 하고 김무와 김용석을 각각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안동시 세거 성씨.
[개설]
광산김씨는 신라 왕자 김흥광(金興光)을 시조로 하고 17세손 김천리(金天利)의 아들 김무(金務)와 17세손 김영리(金英利)의 5세손 담암(潭庵) 김용석(金用石, 1453~?)을 입향조로 여말선초에 와룡면 오천리와 풍천면 구담리에 세거하기 시작한 씨족이다.
[연원]
광산김씨는 시조 김흥광의 후손들이 후대에 내려오면서 여러 계파로 분파되는데 안동 지방에 정착하게 되는 계파는 14세손 양간공(良簡公) 김연(金璉, 1215~1292)의 증손 때에 다시 분파한 김광리, 김영리, 김성리, 김안리, 김천리 다섯파 중에 둘째 김영리(판군기감사공파)와 다섯째 김천리(밀직부사공파)의 후손이다.
[입향경위]
예안 입향조 김무는 고려 충숙왕 때 고양에서 안동으로 이거하여 풍산 도양리(현 풍천면 도양리)에 거주하였고 증손 김효로(金孝盧, 1454~1534) 때에 예안 오천리(현 와룡면 오천리)에 정착하였다. 한편 구담 입향조 김용석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98년 무오사화 때 진취의 뜻을 접고 처향인 구담촌(九潭村, 현 풍천면 구담리)으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예안에 정착한 후 가세가 융성하여 김효로의 아들 운암(雲巖) 김연(金緣, 1487~1544)은 1519년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에 오르고, 둘째 아들 탁청정(濯淸亭) 김수(金綏, 1481~1552)는 생원시에 올랐다. 김연의 아들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은 학행이 높아 뒤에 문순(文純)을 시호로 받았으며 김부필의 동생 읍청정(揖淸亭) 김부의(金富儀, 1525~1582) 또한 진사로 성리학에 밝았고, 김수의 아들 산남(山南) 김부인(金富仁, 1512~1584), 양정당(養正堂) 김부신(金富信),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1531~1598) 삼형제가 모두 문명과 덕망을 떨쳐 오천리가 군자리로 일컬어졌다.
김부의의 아들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1555~1641)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지냈으나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용궁, 밀양, 경주 등지에서 활동하다 진중에서 죽었다. 김부륜의 아들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9~1641)은 1612년 문과에 올라 사간원사간을 지냈고 40년간의 일기 『계암일록(溪巖日錄)』을 남겼다. 이들 외에도 김전(金㙉)과 북애(北厓) 김기(金圻) 형제, 김평(金坪), 김광계(金光繼)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그들의 세거지 외내를 군자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군자리’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순천김씨(順天金氏)인 예조참의 김유온(金有溫)의 손서가 되어 구담촌에 정착한 담암 김용석은 여덟 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김황(金篁)과 일곱째 아들 김호(金箎)가 구담에 정착하였고 둘째 김균과 셋째 김시는 각각 봉화 거촌과 성주 초전으로 이거하였다.
넷째 아들 진사 김주(金籌)는 안처정(安處貞)의 사위가 되어 와룡면 가구리에 정착하였으며 아들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 1520~1588)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서 후진 양성에 힘써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말라는 김용석의 유훈을 지켜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며 산림처사로 은거하여 왔다. 김언기의 아들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1555~1637)과 김득의(金得礒), 현손 긍구당(肯構堂) 김세환(金世煥)은 세인의 추앙을 받은 학자들이다.
[현황]
광산김씨 예안파는 1970년 안동댐 공사로 오백 년 세거지가 수몰되어 옛 마을 뒷산에 새로 부지를 조성하여 군자리로 이름 붙이고 수몰지에 흩어져 있던 묘우, 종택, 누정 등 건축물들을 집단적으로 이건하여 문화재 단지를 조성하고 대대로 내려오던 고문서와 전적은 유물각인 숭원각(崇遠閣)을 지어 보존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후손들은 안동, 서울 등지로 흩어져 나가고 오천리는 사실상 없어지게 되었다.
[관련유적]
예안파의 각종 건축물을 이건하여 단지를 조성한 군자리에는 탁청정, 후조당, 탁청정 종가, 후조당 종택, 재사 및 사당, 침락정(枕洛亭), 설월당, 양정당, 낙운정(洛雲亭), 읍청정 등 고건축물과, 광산김씨 예안파 종가 21대 600년간에 걸쳐 전래된 고문서 1,000여 점과 전적 3,000여 책이 유물각에 보존되어 있다. 예안 입향조 김효로의 묘와 재사가 녹전면 죽송리에 있다. 구담파 입향조 김용석의 유허비가 풍천 구담리에 있고 유일재 고택(김언기)과 긍구당 고택(김세환)이 각각 와룡면 가구리와 와룡면 주계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