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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1972
한자 佛像
영어의미역 Buddhist Image
이칭/별칭 불교조각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김춘실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불교의 예배 대상을 조성한 조각상.

[개설]

불상(佛像)이란 불교의 교리에 의한 예배 대상을 석재나 금속 또는 흙이나 나무 등의 시각 매체를 통하여 조성한 조각상을 말한다. 엄격한 의미로는 붓다 즉, 여래(如來)의 존상만을 의미하나, 넓은 의미로 보살상·천왕상·명왕상·나한상 등 불교의 모든 예배의 대상을 포함한다. 이들은 재질에 따라 석불·마애불·금동불·철불·소조불·목불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여래란 깨달음을 얻은 자로,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여래는 오직 석가모니 부처님만 존재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교리의 전개에 따라 많은 여래가 등장하게 되는데, 석가모니불·연등불·미륵불·아미타불·약사불·비로자나불 등이 있다. 보살이란 개념도 대승불교에서 나온 것으로, 성불의 뜻을 품고 수행을 지속하고 있으나 보다 중생의 교화 제도에 힘쓰고 있는 존재를 말한다.

보살을 대표하는 것은 관음보살이며, 이외에도 문수보살·보현보살·대세지보살·일광보살·월광보살·미륵보살 등이 있다. 이들은 단독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여래의 양쪽에서 보처보살로 삼존상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이외에 불국토를 수호하는 천부(天部)의 상인 범천·제석천·사천왕·팔부중·인왕 등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소 수행하여 전수하는 나한·조사 등도 예배상으로 조성된다. 이들 다양한 불상들은 외모적으로 그 교리에 맞는 제각기의 특징을 갖게 된다. 여래상은 초인간적인 불격에 맞게 32상 80종호라는 신체상 특징이 있는데, 나발·육계·백호·두광·신광 등이 그것이다. 특히 손의 모습인 수인(手印)은 각기 여래의 불성을 구별 짓는 중요한 특징으로 시무외 여원인·선정인·항마촉지인·지권인 등이 있다.

보살은 보관과 영락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고 다양한 지물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천왕상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므로 갑옷과 칼 등으로 장엄하고, 나한상은 수행하는 승려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들 불상들은 시대에 따라 그 표현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이를 양식(樣式)이라 하여 불상의 제작 시기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삼국시대]

삼국시대 충주 지역의 불상은 고구려의 영향을 강하게 보인다. 이는 고구려가 5세기 이후 남하 정책을 취하여 충주 지역에 국원성(國原城)을 둔 때문이다. 노은면 천룡산 보련사지에서 발견된 ‘건흥5년명 금동석가삼존불광배’나 ‘중원 봉황리 마애불상군’은 대표적인 예이다.

‘건흥 5년명 금동석가삼존불광배’는 좌우의 협시보살이 함께 부조된 광배인데 좌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본존상은 잃었다. 주형의 광배로 광배내의 화염문은 율동감이 있고 3구의 화불이 고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뒷면에는 “건흥오년세재병진(建興五年歲在丙辰)”으로 시작되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6세기 말경의 고구려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원 봉황리 마애불상군’은 고구려비가 발견된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의 산 중턱에서 발견되었는데, 시무외 여원인의 여래좌상을 중심으로 한 공양상과 반가사유상을 중심으로 한 보살상군 두 군집으로 나뉘어진다. 사자좌에 앉은 여래 좌상의 양식이나 특히 한 다리를 괴고 앉은 공양상의 모습으로 보건대, 이 불상은 고구려 계통의 6세기 말 내지는 7세기 초반의 상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들의 독특한 배치나 신앙적인 성격은 신라의 ‘단석산 마애불상군’과 비교되어 이곳은 미륵 도량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상으로 볼 때 삼국시대 충주 지역의 불교 문화는 비록 신라가 이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한 6세기 중엽 이후에도 대체로 선진인 고구려 문화의 영향권 하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에는 새로이 정복된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9주 5소경제가 실시되었는데, 충주는 지속적으로 중원경으로 편제되어 이 시대 중원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충주 지역은 통일 이후에도 중시되어서 중앙탑이 세워지고 또한 법경대사비(法鏡大師碑)와 홍법국사비(弘法國師碑)가 전하는 정토사·금생사 등의 사찰이 건립되고 있으나 불상으로 전하는 예가 없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불적들은 소경이 설치된 지역인 때문인지 당시 중앙과 양식면에서 큰 차이 없이 밀접한 관련을 보인다.

[고려시대]

고려시대가 되면 불교 사원의 건립이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그 예가 급증하게 되는데, 충주 지역에도 많은 불적이 남아 있다. 특히 고려 초기에는 고려 왕실과 혼인으로 결탁된 충주유씨 등의 호족 세력들에 의해서 독특한 불교 문화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 불적으로는 충주 미륵대원지, 광종의 어머니인 신명순성왕태후 유씨의 명복을 위해 세워진 숭선사, 충주 원평리 석조여래입상, 억정사, 대원사단호사의 철불 등이 있다.

계립령에 위치한 충주 미륵대원지는 중원 지역의 불적 중에서 가장 먼저 주목된 곳으로 석굴사원지와 석불입상·석탑·석등 등이 전한다. ‘충주 미륵대원지의 석불입상’은 머리에 보개를 쓰고 손에 둥근 지물을 들은 상으로 머리는 나발이고 목에 삼도가 보이는 등 여래형의 모습이다. 불신은 사실적인 표현이 전혀 없이 긴 기둥 모양이어서 키만 장대한데 이러한 불상의 표현은 고려 중기 이후 석불에서 자주 보인다.

고려 광종대에 세워진 것이 확실한 숭선사에는 불상이 전하고 있지 않고, 이곳과 인접한 충주 원평리 석조여래입상이 서 있다. 불상의 원만한 상호와 대의 형식이 통일신라 불입상의 양식을 따르고 있어 고려 초기의 불상으로 추정되는데, 연대상 앞의 숭선사와도 관련 있는 불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들 충주 지역의 고려 초기 불적들은 규모도 크고 또 국가의 안녕과 밀접한 관련을 보여서 고려 왕실의 후원을 받은 충주유씨의 세력과 관련이 있는 불적들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충주 지역에서 유행한 독특한 불상 양식의 예로 자주 거론되는 불상으로는 백운암단호사, 대원정사의 철불들이 있다. 충주는 고대로부터 철의 생산지로서 유명한데 철불이 전하고 있는 사실은 흥미롭다. 이들 중 백운암 철불은 최근 겉면을 덮고 있던 호분을 벗겨낸 결과, 조성 시기가 통일신라 말기 내지는 고려 초기까지 올려 가고 있어서 철불의 전통이 일찍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머지 두 상은 눈 꼬리가 올라가고 무섭게 생긴 얼굴 표정과 옷 주름 형식이 거의 같아서 같은 곳에서 제작된 철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 충주 지역의 대표적 불적은 소태면 청계산청룡사지이다. 이곳은 폐사되어 불상은 전하지 않고 태조의 사부인 보각국사(普覺國師)의 부도와 탑비가 전한다. 충주시 직동에 있는 ‘창룡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이 시기의 충주 지역의 대표적 불상이라 할 수 있는데, 복장기에 의해 1730년(영조 6)에 조성된 상임을 알 수 있다.

이 상은 얼굴이 작고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상반신이 길죽하다. 배에서 좌우 대칭을 이루며 둥글게 늘어지는 옷 주름이 특징으로, 이와 같은 목불상은 18세기 충청북도 지역에서 유행한 듯 제천 신륵사의 목불상 등에서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억정면 신흥사에서는 특이하게도 두건을 쓴 ‘석조나한상’이 4구 전한다.

[충주지역 불상의 특징]

충주 지역의 불상은 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인 성격인 교통과 군사의 요지라는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삼국시대 불교 수용 초반에는 이 지역의 불상은 신라의 중심부인 경주 지역에 비해 선진인 고구려 양식의 영향을 보였고, 이후 시대에는 교통과 군사의 요지 즉 국가의 안녕과 관련된, 특히 호국과 관련된 불적이 많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의 중앙탑이나 고려 초기의 충주 미륵대원지 석불상 등은 그 예들이다.

그 외 충주 지역의 불상들은 화엄 신앙이나 선종 신앙 같은 불교 신앙의 중심 역할을 하는 대사찰과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지방 행정의 중심지 즉 지방 문화의 중심지의 불상으로 충주 사람들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된 특징을 보인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4.12 문화재 명칭 현행화 가금면 마애불상군을 중원 봉황리 마애불상군으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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