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1212 |
---|---|
한자 | 唐津農樂 |
영어공식명칭 | Dangjin Traditional Music|Dangjin Nongak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놀이/놀이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금돈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에서 마을 사람들이 놀이나 중요 행사에서 즐기던 대표 농악.
[개설]
당진 농악은 충청남도 당진시에서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선조들의 생활 놀이 문화로 1980년대 초까지 전국에서도 우수한 농악으로 자리매김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침체기에 들어 많은 농악대가 해체되었으나 1990년대 초부터 활성화되어 이어졌다. 오늘날에는 당진 전통 농악 보존회인 '당진농악대'에 의해 보존되고 계승되고 있으며 꾸준한 전수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연원]
당진 농악이 시작된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처음에는 두레 농악으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두레 농악은 작은 마을마다 적게는 4~5명에서 그 이상으로 구성된 마을 농악단으로 마을 행사나 특히 농사와 마을 공동 작업 때 동원되었던 농악을 말한다. 충청남도 당진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300여 두레 농악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조사되었고, 1970년대 말까지 활성화되었다. 충청남도 당진시의 두레 농악은 구한말까지 주로 이채, 삼채, 칠채, 마당 삼채 등 몇 가지 가락만을 사용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탄압에 의해 잠시 와해되었다. 광복 이후 기지시리, 합덕읍 및 당진시 인근 지역에서 난장이 들어서면서 규모 있는 두레 농악단이 참여하고 전국에 떠돌던 걸립패들이 모여들어 연회 성격을 띤 걸립패들의 판굿과 교류하며 더욱 발전하였다. 당진시의 두레 농악단들이 농경 생활의 모습을 진풀이로 형상화하고 판굿을 도입하면서 당진만의 특징으로 발전하였다. 전국의 걸립패 중에서도 남사당패가 당진 농악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남사당패는 모내기 시기에 전국을 돌며 걸립 활동을 하다 추수가 끝나면 은거 생활을 하는데 그중 한곳이 당진시였다. 당진시의 합덕읍 성동산성, 면천면의 영탑사 주변 성하리, 순성면의 구절산 주변 및 봉소리가 남사당의 은거지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진 농악은 1945년 광복 이후 1960년대 초에는 단순한 두레 농악에서 벗어나 흥과 기량을 겸비한 연희성이 강한 판굿이 도입되고 당진만의 독특한 가락을 도입해 더욱 발전했다. 당시 당진시 출신의 우수한 농악 기량인들이 전국에서 활동하였는데, 당진시 우강면 출신의 전근배는 남사당패의 꼭두쇠를 맡았고 태평소의 1인자로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였다. 남사당패에서 활동하던 합덕읍 성동리 출신의 정일파는 당진 농악의 선구자이며 전국 최고의 농악 기량인이었다. 뒤를 이어 우강면 원치리의 박재돈과 합덕읍 창정리의 채규태, 면천면 송학리의 이호성, 신평면 도성리의 이병윤 등도 최고의 농악 기량인이었다. 박재돈은 걸립패로 수많은 활동을 하였고, 채규태는 정일파의 뒤를 이어 당진시의 가락과 판굿을 당진시 전 지역을 돌면서 지도하고 보급하여 오늘날의 당진 전통 농악을 정착시키는 데 헌신하였다. 이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 침체되어 가던 당진 농악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함께 활동하던 우강면의 이진산·김동기·이영우·김길성, 송악면의 윤병호·김대진·김영수, 합덕읍의 손동명·김순환·최종렬·박우규, 당진읍의 김병일, 신평면의 이기용 등이 모여 당진농악 친목회를 결성하였다.
[놀이 도구 및 장소]
당진 농악에 필요한 도구는 꽹과리, 징, 장구, 북, 상모, 태평소 등이 있으며, 장소는 장애물이 없는 넓은 곳이면 어디에서든 즐길 수 있다.
[놀이 방법]
당진 농악은 일채[들어라장단], 이채[물텅뱅이장단], 삼채[춤장단], 짝쇠[담배장사 똥쌓다], 오채 좌우치기, 칠채[질군애비],육채, 굿거리[춤가락], 오방진[동살풀이], 껙끼춤, 진격쇠, 마당 삼채[된삼채], 태극 좌우치기, 삼보 좌우치기, 벅구 좌우치기 등의 독특한 가락으로 이루어져 전승되고 있다. 당진 농악은 꽹과리를 치는 상쇠의 지휘에 따라 연주를 하며 놀이 방법은 여러 형태가 있다. 안택굿은 조상들이 마을의 안녕과 풍농, 풍어 등을 위해 하늘에 제[동신제:마을 수호신, 지신밟기:마을 전가정을 돌면서 잡귀와 해충을 밟아 몰아내고 이로운 기운을 받아주는 의식] 등을 올리는 데 동원되었던 농악이다. 둘째, 두레굿은 주로 노동과 농삿일에 동원되어 노동의 힘을 한데 모아 지친 심신을 풀며 마을의 화합과 단결의 구심적 역할을 했던 두레 농악이다. 걸립굿은 농사뿐 아니라 마을의 공금을 마련하거나 사찰에서 불사를 위해 모금에 동원되었다. 이렇게 모은 마을의 공금은 마을 앞 다리 설치, 상여 마련, 농악기 구입 등에 사용하였다. 놀이굿은 놀이 문화가 다양하지 못했던 옛날에 명절이나 농한기에 즐기거나 마을 잔치 등에서 행해졌다. 판굿은 전문적으로 농악을 하던 집단인 걸립패들이 생계를 위해 공연하였다. 걸립패는 농악을 하는 사람 또는 차력사, 마술사 등 독특한 장기와 잡기가 있는 사람들이 적게는 4~5명, 많게는 10여 명 이상이 모인 집단이다. 생계를 위해 전국을 떠돌면서 난장 또는 마을 및 관공서로부터 초청을 받아 공연을 하고 대가를 받았는데 남사당패, 솟대패 등이 있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농악은 옛 선조들의 생활 그 자체였으며, 마을의 경사가 있을 때, 노동의 현장, 마을의 의전 행사, 마을 기금 걸립 등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놀이였다. 또한 전국의 각 지역마다 독특한 지역 가락과 판굿으로 이루어진 종합 예술로 전승되고 있다. 당진 농악은 과거에 단순 두레 농악과 마을 제천 의식 또는 공동체 및 여가 선용의 놀이였고, 마을 중요 행사[회갑, 기념 행사 등]에 빠짐없이 동원되었던 옛 선조들의 생활 놀이 문화였다. 광복 이후 전국에 떠돌던 걸립패들의 연희성을 가미한 판굿을 도입하여 발전하였고, 1980년대 초까지 전국에 우수한 농악으로 자리매김하였으나 1980년대 중반부터 침체기에 들면서 많은 농악대가 해체되고 빛을 잃어 갔다. 1990년대 초부터 다시 한 번 당진 농악이 활성화되어 약 10여 년간 이어졌으나, 서양 문화가 대중화되면서 우리의 전통문화는 잊혀지고 서양 문화에 비해 고급스럽지 못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그러나 당진시는 당진 전통 농악 보존회 '당진농악대'가 농악을 보존하고 계승하면서 꾸준한 전수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현황]
당진 농악은 2016년 원로 농악인 10명, 기존 회원 35명이 당진 전통 농악 보존회 '당진농악대'를 조직하여 고증 및 발굴 조사와 연구를 거듭하면서 전통과 맥을 잇기 위해 보급 및 전승 활동을 주도적으로 하고 있다. 충청남도 당진시의 각 읍과 면에서 활동하던 농악대들의 판굿 놀이를 모아 연출하여 재현하여 매년 1회 공연을 하고 있다. 2005~2006년 충청남도지사기 농악 대회 출전하여 2연속 장원을 하였다.
오늘날 당진시는 순성 농협 하나로 농악대, 면천 농협 주부 농악대, 합덕 농협 연호 농악대, 정미 농협 울림 농악대, 대한 노인회 우강 분회 소들 농악대, 신평 농신마농악대 등 각 읍과 면에서 팀을 이루어 주로 당진 전통 농악과 판굿 놀이를 위주로 하여 대체적으로 규모 있는 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소규모 마을 농악대로는 우강면의 대포리·내경리·송산 3구, 신평면의 신흥리·운정리·신당리, 합덕읍의 점원리·옥금리, 면천면의 원동리·삼웅리 1구·삼웅리 2구, 대호지면의 마중리, 석문면의 교로리 1구, 고대면의 당진포리 외에 약 10여 마을에서 농악대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