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16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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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傳統-歷史-現代-赤木里 |
영어공식명칭 | Jeongmok-ri with a History of Tradition and Modern Pain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덕묵 |
[정의]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의 역사유적과 산촌의 문화자원, 자연마을에 관한 이야기.
[개설]
가평군 북면 적목리의 역사유적과 산촌의 문화자원, 자연마을, 역사교육의 현장, 산촌 휴양지로 발전하는 마을의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계곡 사이에 있는 크고 작은 자연마을]
가평 읍내에서 화천군 사내면으로 가는 국도 제75호를 따라 30여㎞를 가면 목동초등학교 명지분교 앞에 있는 적목리 마을회관에 도착할 수 있다. 마을회관이 있는 곳은 ‘학교마을’이라고 하며 적목리의 여러 개 작은 촌락 중 중앙에 있어서 편의상 이곳에 마을회관이 들어섰다. 그러나 사방에 있는 다른 촌락을 찾아가려면 몇 ㎞를 더 가야 한다.
적목리는 7반까지 전체 130여 가구가 되지만 주택들은 여러 갈래의 계곡을 따라 드문드문 떨어져 있다. 행정상 적목리는 여러 개의 작은 촌락들이 떨어져 있는 면적이 매우 넓은 곳이다.
적목리에서 가장 큰 촌락은 45가구가 있는 논남마을이다. 다음으로는 4반에 속하는 용수동이며 마을회관이 있는 2반에 속하는 학교마을은 20가구가 있다. 가평 읍내 방향에서 적목리 초입에 다다르면 명화동[거릿내]마을이 있는데, 명화동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마을을 관통하는 개울 옆 도로를 따라 강씨봉 가는 방향으로 가다 보면 텃바위마을, 소락개마을, 논남마을이 나온다.
명화동삼거리에서 직진하여 조금 가면 학교마을이 있으며 점말, 가림, 용수동, 솔둔지, 조무락골, 연꽃마을이 이어져 있다. 조무락골 입구를 지나 계속 2차선 도로를 따라 2㎞ 가면 ‘38선’ 표시가 있으며 조금 더 가면 우측에 신앙유적지1이 나오면 그곳에서 1㎞ 정도 더 가면 우측에 신앙유적지2가 나온다.
점말은 과거 옹기점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강씨봉 아래에 있는 논남기 서쪽에는 강씨봉마을이 있으며 강씨봉마을 북쪽에 있는 텃골에는 궁예의 황후였던 강씨(康氏)의 집터가 있었다고 한다.
[척박한 생태환경을 극복하고 살아온 적목리 주민]
적목리는 이깔나무[赤木]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명지산 뒤편으로 강씨봉, 국망봉, 도마봉, 석룡산, 화악산이 둘러싸고 그 사이로 생긴 계곡에 작은 하천과 주택이 드문드문 들어선 마을이라 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과거 주민들은 산비탈에 화전을 일구어 살아왔다. 산악지대인 이곳에서 식량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산에서 나무를 베어 팔거나 산나물을 채취하여 판매하는 것도 주민들의 생업에서 소득원이 되었다.
적목리 용수동 종점에서도 10여 리를 가야 하는 조무락골에서 가평 읍내 시장을 가려면 90리 길이다. 과거 콩이나 팥을 팔아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곡식을 질빵에 지고 걸어서 하루가 걸리는 길을 다녀야 했다.
조무락골에 거주하는 임호준 옹은 과거 그렇게 가평읍을 다녔다고 한다. 10여 년 전 2차선 포장도로가 놓였지만 그전에는 자갈길이라 도로 사정도 좋지 않았다. 대중교통으로 버스가 들어오기 전에는 한동안 1톤 짐차가 주민들을 태우고 다녔다.
과거 골짜기마다 아이들이 많아서 아침이 되면 버스에 학생들이 가득하였으나 노년층이 많은 현재는 학생들이 거의 없다. 마을에 두 개의 초등학교가 있었으나 현재 하나는 폐교가 되었다.
1970년대 초 국가에서 화전을 금지하자 화전민들은 대부분 인천이나 단양 구인사 쪽으로 떠났다. 화전이 있던 자리에는 잣나무가 조성되어 오늘날 가평잣의 유명세를 도왔으며 주민들의 소득원으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교통이 좋아지면서 근래에 주민들은 펜션, 유원지 등을 운영하여 사는 사람들이 많다. 펜션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휴가철 및 주말에 오기 때문에 이곳의 장사도 성수기와 비수기로 나누어진다. 오늘날 인터넷이 발달하여 각지에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1년 중 성수기인 휴가철에는 붐비나 다른 계절에는 주말에 좀 손님이 있고 평일에는 한가한 편이다. 펜션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노후를 전원에서 보내기 위해 이곳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도 있다.
[역사교육의 현장! 적목리]
적목리에는 후삼국시대의 유적에서부터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6·25전쟁, 그리고 전쟁 후 어려운 환경 속에서 화전을 일구던 역사까지 적지 않은 한국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강씨봉마을 북쪽에 있는 텃골에 궁예의 황후였던 강씨의 집터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주민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궁예가 왕으로 있었던 태봉의 도읍지가 철원에 있었고 이곳과 인접한 강씨봉 부근에 강씨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논남마을에는 1700년(숙종 26) 3월에 세워진 강영천 효자문이 있다. 현재의 것은 기둥만 남아있던 것을 1989년에 복원했다. 강영천은 홀어머니가 병에 들어 정신을 잃자 7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손가락을 문지방에 깨뜨려 피를 내어 어머니 입에 흘려 넣은 뒤 쓰러졌다. 그 뒤 어머니는 병이 완쾌되고 소문을 알게 된 조정에서는 정문을 하사하였다.
논남마을 도로가에는 ‘항일독립운동사적비’도 세워져 있다. 비문을 보면, 현학근은 3·1운동 때 덕천 서문시장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1924년 가평으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다가 1934년 비밀결사 민족단체인 태극교에 입단하여 독립을 위해 동지들을 모집하였다고 한다. 이후 현학근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사적비는 2016년 현학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웠다.
조무락골에는 일제강점기 무참히 신도들을 죽인 백백교 교주 전용해가 신도들과 머물던 터가 있다. 1937년 전용해와 간부들의 죄상이 밝혀지자 전용해는 양평 도일봉으로 도망갔다가 자살하였다. 적목리는 암울한 당시 또 다른 종교의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강제징집 등의 정책을 거부하고 피신하여 산비탈에서 신앙공동체 생활을 하던 유적지도 있다. 1943년 9월 15일 신태식, 반내현 등 여러 명의 선발대가 이곳에 도착하여 움막을 지었다.
그해 12월 초 김명길 목사가 강사로 나서서 연말 기도주일 및 사경회를 하고 민족 독립과 해방, 교회를 위해 기도를 하였다. 1944년 겨울에 일제 헌병대가 급습하여 윗 장소에서 가평 방향으로 1㎞ 떨어진 곳으로 일부가 옮겨와서 살았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이하면서 하산하였다. 이곳에는 교회터, 움막, 숯가마 터, 관솔불 터, 부뚜막 등의 유적지가 있다. 이곳 안내판을 보면 당시의 현실을 추정할 수 있다.
“공동생활유적은 일제강점기에 산기슭 곳곳에 반지하식 움집을 짓고 공동생활을 하던 곳으로 1943년 신사참배, 창씨개명, 종교탄압과 강제징용을 피해 모여든 주민들이 은신하며 신앙심을 지키던 유적이다. 유적지는 약 1㎞를 사이에 두고 두 곳에 조성되었으며 목탄 생산과 경춘철도에 소요되는 침목 조달을 하며 광복 이후까지 초목 근피로 연명하며 거처하였다....”
이곳 공동생활유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및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적목리 일대는 6·25전쟁 당시인 1951년 4월 국군 6사단과 중공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지역으로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육군 5사단이 유해발굴을 하여 호국용사 253위의 유해와 유품 750점을 발굴하였다.
도마치고개로 가는 길목에는 전사자들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고귀한 희생을 알리고자 ‘평화의 쉼터’를 조성해 놓았다. 고대에서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유적이 있는 적목리는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읽게 해 준다.
또한 교훈도 적지 않다. 강영천 효자문은 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를 위한 효도심이 지극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다시금 효를 깨우쳐주며 항일독립운동사적비와 공동생활유적은 독립운동, 평화의 쉼터에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전사자들의 고귀한 희생을 느낄 수 있다.
적목리는 그야말로 역사교육 현장으로서 손색이 없다. 역사문화자원이 풍부한 적목리이나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산촌의 생활문화자원이 풍부한 적목리]
6·25전쟁 이후 월남한 사람들이 대거 몰려와서 지역민들과 화전을 일구어 살던 역사, 통나무를 쌓아올리고 나무 안과 밖으로 흙을 발라서 벽면을 두껍게 한 도치장집도 화전민들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산촌의 생활문화자원이다.
도치장집에 들어가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아늑하다. 정겨운 시골집과 같은 정취 또한 하룻밤 묵고 싶은 설렘으로 다가온다. 적목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생태환경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주민들은 산에 의지하고 산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예로부터 산에 대한 감사와 주민의 안녕을 위해 산신제를 지내왔다. 논남마을 도로가에서 개울을 건너가면 소나무와 산을 향해 만들어놓은 제단이 있다. 논남 주민들은 생기복덕을 보아 제관을 선정하여 8월 추석 5일 전에 산제를 지낸다.
제물로는 통돼지, 삼색 과일, 백설기, 막걸리, 통북어, 초, 향 등을 준비한다. 제물은 산에서 직접 쪄서 한다. 조무락골에서도 산제를 지낸다. 조무락골에서 5대째 거주하고 있는 임호준 옹은 과거 주민들이 많았을 때는 조무락골 전체가 돼지와 백설기, 직접 담근 술, 통북어 등을 놓고 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현재는 임호준 옹 혼자서 매년 봄, 가을로 지내고 있다.
20여 년 전 고로쇠가 나오면서 연꽃마을에서도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산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고로쇠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하고 있다. 산신제뿐 아니라 적목리에서 지내던 집 고사, 장례 풍속, 생활용구, 화전민들의 용구 등 다양한 생활문화자원이 풍부한 적목리는 방문객들의 볼거리 및 체험거리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산촌 휴양지로 발전하는 적목리]
적목리에는 하늘 높이 솟은 아름다운 산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쌍룡폭포, 무주채폭포, 적목용소, 강씨봉자연휴양림 등과 같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계곡물에는 메기, 꺽지, 모래무지 등의 물고기가 살고 있으며 산에는 멧돼지, 노루, 고라니 등이 있다. 또한 취나물, 고비나물, 능이버섯, 고로쇠 수액, 두릅, 토종꿀, 도토리, 잣, 사과, 느타리버섯, 옥수수, 더덕, 다래, 산갓, 고추 등의 농산물 및 임산물이 생산되고 있다.
가공품으로는 만두, 민물매운탕, 잣국수, 고로쇠 간장, 고뢰쇠 조청, 도토리전, 백숙, 감자전, 도토리묵, 두릅김치, 손두부 등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생태환경과 특산물은 주민들의 수입원의 동력이 되고 있으며 휴양을 즐기고자하는 방문객들을 이곳 펜션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되고 있다.
적목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이러한 자연 생태환경 및 특산물, 역사문화자원, 생활문화자원을 지혜롭게 활용하여 수도권의 휴양 및 관광지로서 거듭나는 것이다. 산신제를 활용한 마을축제, 보다 흡입력이 있는 휴양림과 등산로 활용, 역사문화자원과 생활문화자원을 활용한 1일 탐방길 조성, 신앙유적지 복원, 화전민 민속과 도치장집촌 조성 등 다양한 측면에서 창의적인 기획이 요구된다.
역사문화자원, 생활문화자원, 자연환경, 주민생활사, 현재 주민들의 활동 및 삶의 이야기 등을 지속적으로 수집하고 활용하는 마을 거점으로서 마을기록관을 설립하는 것도 필요하다.
마을 문화자원 및 주민들의 생활과 문화를 기록하고 전시하고 활용할 수 있는 마을기록관을 통해 방문객들이 적목리의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역사문화 마을로서의 적목리를 한층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