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5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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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根奭 |
영어음역 | Yi Geunseo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채운면 심암리 271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이시경 |
성격 | 독립운동가|교육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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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남도 논산시 채운면 심암리 271 |
성별 | 남 |
생년 | 1898년 3월 23일 |
몰년 | 1975년 7월 3일 |
[정의]
일제강점기 논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활동사항]
이근석은 1898년 3월 23일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대교면 지역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월에는 독립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고, 논산 지역에서도 1919년 3월 10일과 3월 12일 두 차례에 걸쳐 독립 만세 시위가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이근석은 1919년 3월 20일 강경 장날을 이용하여 다시 독립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송재기·이근오·이봉세 등과 함께 결의하였다. 1919년 3월 16일부터 3월 18일까지 3일간 이근석은 자신의 집에서 독립 만세 운동에 쓸 태극기 300여 개를 제작하였다.
1919년 3월 20일 오후 5시경에 이근석 등은 심암리와 화정리 주민 70여 명을 규합하여 옥녀봉에 올랐다. 이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장에 온 군중을 합세시키면서 강경장 내 윗시장으로 진입하여 만서정(萬西町)으로 이동하면서 독립 만세 시위를 계속 벌였다. 이근석은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며, 1919년 4월 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1년 2월형을 선고 받았다. 이에 항소하여 1919년 5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10월형을 선고 받고, 또다시 상고하였으나 1919년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징역 10월형을 확정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근석은 출소 후 1923년 3월부터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채운면 심암리 지역에 채운학원(彩雲學院)을 설립하여 주민들의 문맹퇴치와 청소년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이에 일제는 1925년 이근석의 채운학원을 강제 폐교하였나, 이근석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1932년 3월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지역에 신풍학원(新豊學院)을 다시 설립하여 학생들의 항일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해방 후에도 공민학교(현 기민중학교)를 설립하여 후학 교육에 헌신하였다. 이근석은 1975년 7월 3일 77세로 별세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으며, 1990년에는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