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0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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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영어의미역 | Japanese Invasion of 1592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연숙 |
발생(시작)연도/일시 | 1592년 4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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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연도/일시 | 1598년 |
발생(시작)장소 | 부산포 |
관련인물/단체 | 선조|도요토미 히데요시 |
[정의]
임진왜란 당시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서 전개된 전투.
[개설]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1597년의 제2차 침략전쟁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文祿慶長)의 역(役),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이라고 한다. 당시 충청남도 논산 지역도 특히 제2차 침략전쟁을 계기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는 격전지가 되면서 막대한 피해를 당하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 조선의 정세는 정치적으론 연산군 이후 명종에 이르는 4대 사화와 훈구 세력·사림 세력간의 정쟁으로 인한 중앙정계의 혼란으로 인해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리고 군사적으로는 조선 초기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의기관을 설치하여 빈번한 외침에 대비해 왔으나 이 또한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으며, 이이(李珥)가 남왜북호(南倭北胡)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며 국방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나 오히려 배척당하는 실정이었다.
이와 더불어 일본에서는 새로운 형세가 전개되고 있었다.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의 전국시대를 종식시키는 국내통일에 성공한 후 각 제후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대륙침략을 계획하게 되면서 일차적으로 조선을 침략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당시 논산 지역도 이러한 국제정세로부터 벗어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지역의 하나가 되었다.
[목적]
국내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랜 기간의 국내전란에서 형성된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대륙침략을 통해 해외로 방출시킴으로써 도전세력의 억제와 더불어 국내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실행하였다.
[발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침략을 위한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바로 원정군을 편성하고 1592년 4월 침공을 명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경과]
1차 침입 때인 1592년의 경우 논산 지역은 왜군의 북상로에서 벗어나 있었던 관계로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그러나 2차 침입에서는 충청도 대부분의 지역과 더불어 논산 지역도 왜군과의 주요 격전지가 되면서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1596년 휴전협상이 결렬되자 왜군은 이듬해인 1597년(선조 30) 정월에 재침을 감행하여 남해·사천·고성·하동·광양·구례·남원을 차례로 점령한 후 전주에 집결하였다.
이중 좌군은 남쪽으로,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으로 편성된 우군은 충청도로 북진했다. 이에 같은 해 9월초 충청방어사 박명현 부대가 논산 지역의 여산·은진 등지에서 왜군을 맞아 종일 접전하면서 많은 적을 사살하였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후퇴하였다.
[결과]
이 과정에서 논산 지역도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리고 두 번에 걸친 왜란과정에서 논산 지역에서도 많은 의병들이 배출되었다. 논산 출신의 대표적인 의병으로는 양함, 박이현, 양응춘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후에 정려를 하사받고 자신들의 문중사우에 배향되었다. 또한 참혹한 상황에서도 열행을 행한 진진의 처 담양국씨, 박동민 처 전주이씨, 이공겸과 그의 처 민씨 등도 후에 정려를 하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