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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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一運動 |
영어음역 | Samil Undong |
영어의미역 |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진각 |
[정의]
1919년 3월 1일부터 약 2개월 동안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
[역사적 배경]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식민지 정책에 대한 저항으로 항일 사상이 용인 지역에서 높아져 자주 독립을 바라는 민중들의 바람이 높아졌다. 또한 1919년 1월에 고종 황제가 갑자기 승하하자 일본인들이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퍼져 민중들이 분노하였다.
또한 일본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하였고 이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자 이에 힘입어 거국적인 독립 만세 운동이 계획되었다. 게다가 한 나라의 주권은 그 나라의 국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미국 윌슨 대통령의 주장이 만세 운동에 희망을 심어주었다.
[경과]
용인 지역에서의 3·1운동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평화적인 시위가 전개되다가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탄압과 발포로 점차 폭력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를 면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여면(水餘面)에서는 3월 28일 유방리에서 500여 명의 농민들이 격렬한 시위를 벌였으며, 이 날 김량장리에서는 300여 명의 농민이 평화적인 만세 시위를, 이어 3월 30일 김량장에서는 2,000여 명의 농민들이 폭력 시위를 벌였다.
모현면(慕賢面)의 경우, 3월 28일 왕산리에서 400여 명의 평화적인 시위가 있었고, 29일에는 내곡리에서 100여 명의 시위가 있었다. 내사면(內四面)에서는 3월 29일 양지리에서 100여 명의 평화 시위가 있었다. 한영규(韓榮圭)와 김운식(金云植) 등은 100여 명의 이민(里民)들을 규합하여 집합시킨 후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높이 부르면서 양지리까지 시위 행진을 하였다.
기흥면(器興面)에서는 3월 30일 오전 10시경 기흥면 하갈리 강가 평지에서 수십 명의 마을 주민들이 김구식(金九植)의 선도 하에 조선 독립 만세를 연달아 부르고, 오후 2시경에는 읍내까지 진출하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수지면(水枝面)의 경우, 3월 28일 고기리(古基里) 구장 이덕균(李德均)이 안종각(安鍾珏)에게 조선 독립 시위 운동을 권유받자, 동네 사환을 시켜 “각 집에서 1명씩 나와 동천리 방면으로 가서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자”라는 말을 전달하였다.
그리하여 이튿날인 29일 오전 9시 동리민 약 100여 명을 규합하고 안종각에게 받은 태극기를 휘두르며 군중의 앞장에 서서 독립 만세를 연달아 부르면서 동천리까지 행진하였다. 그러고 나서 동천리민 300여 명의 군중과 합류하여 함께 조선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어 풍덕천리에서 수지면사무소로 몰려가 만세를 외치고, 다시 읍삼면 마북리로 가려 하였다.
헌병이 총을 쏘아대며 해산을 요구했으나 완강히 저항하다가 오후 2시경 해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종각이 피살되었다. 이어 3월 30일 수지면과 읍삼면에서 천도교인, 농민 1,500명의 격렬한 시위가 일어나 35명이 검거되고 2명이 사망, 3명이 부상당했다.
3월 31일 외사면에서는 3,000여 명 규모의 시위가 일어나 면사무소와 헌병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일본군의 발포로 1명이 죽고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 이어 4월 2일에도 외사면에서 농민 500여 명의 폭력 시위가 일어났고, 이튿날 외사면 백암리에서 시위가 시도되었으나 저지되었다.
이동면(二東面)의 경우 3월 31일 송전리에서 700여 명의 농민이 평화 시위를 벌였다. 고삼면(古三面)에서는 4월 1일 삼은리에서 시위를 벌이려고 하였으나 미연에 발각되었다. 원삼면(遠三面)에서는 3월 21일 좌항리 황경준, 사암리 최상근(崔相根), 안명옥(安明玉) 등이 이민들에게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자”고 권유하여 수백 명의 이민들을 규합, 원삼면사무소 앞에서 오후 3시부터 만세 시위를 벌였다.
맹리(孟里) 이은표(李殷杓)와 이인하(李寅夏)는 면사무소 앞에 모여 있는 군중들에게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독립 운동 분위기를 고취하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용환(李容煥), 김성남, 김영달, 김창연(金昌淵) 등은 이에 적극 참여하다 체포당했다.
이어 3월 31일 원삼면 사암리에서 300여 명이 시위를 하였고, 송전리에서 300여 명의 시위가 있었으며, 4월 2일에는 원삼면에서 500여 명이 시위를 하였고, 남곡리에서 100여 명의 시위가 있었다. 3월 31일 남사면에서는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면장을 끌어내 시위대의 선두에 세워 송전리 헌병 출장소를 습격하려고 했으나, 면장이 완강히 거부하였다. 면장은 자전거를 타고 그 자리를 빠져나와 헌병 출장소에 밀고하였고, 이에 헌병이 출동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다음날에도 군중 약 200여 명은 면사무소를 포위하고 면장을 다시 끌어내려 했다. 면장이 부근의 산속으로 달아나자 군중이 뒤쫓아가 다시 그를 포위했다. 이때 급보를 받고 헌병이 출동하여 군중을 해산시켰다. 4월 2일 남사면 창리에서는 400명의 기독교인, 천도교인, 농민의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
포곡면(蒲谷面)의 3월 28일 시위는 독특하게 전개되었다. 모현 방면에서 용인 읍내 쪽으로 시위를 전개해 가면서 태극기를 릴레이식으로 전달하여 갔다. 시위의 전개는 모현면 초지리에서 포곡면 삼계리로, 삼계리에서 금어리로, 금어리에서 삼계리 사람들은 둔전리로 가고 금어리 사람들은 내사면 대대리를 거쳐 김량장 방면 가는 식으로 시위 행진을 하였다.
[의의와 평가]
3·1운동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민중의 민족적, 계급적 자각이 형성되었으며, 민중이 모든 영역에 걸쳐 주동적인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민중은 근대적 변혁 운동을 성공시킬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민중들의 한계는 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 전쟁과 그 이후의 의병 활동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용인에서의 3·1운동은 많은 수의 민중이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적 민족 운동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즉 당시 민중은 민주주의 변혁 운동을 독자적으로 수행할 만큼 역량이 성숙되지 못하였다. 용인 지역에서도 3·1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민중이 주력군(主力軍)의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이 부르주아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