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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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부(이진화)께서 1821년에 경주 입실에서 태어나셨답니다. 그 분이 회갑 때 아들 용언을 데리고 들어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마도 1881년경에 울릉도에 들어왔을 겁니다. 저희 고조부께서 회갑 때 울릉도에 들어오셨다고 누차 들었으니 분명 1883년 이전에 들어온 것만은 분명합니다. 흔히들 울릉도 개척을 말할 때 1883년 16호 54명에 지나치게 초점을 두고 개척사를 말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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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하 2리 학포마을 남단에 산왕각으로 가기 전 해변 암벽면에 새겨진 각석문(임오명각석문)으로 문화재자료 제4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각석문은 고종 19년(1882) 5월 검찰사 이규원이 조정의 명을 받아 울릉도 내 경작이 가능한 지역을 답사하고, 무단으로 왕래하는 일본인들의 실태를 파악하도록 파견되어 체류하고 있을 때 새긴 것이다. 그의 '울릉도검찰일기계본초(鬱陵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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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과 관련하여 1945년 이전에 제작된 문서와 책·기록 등 현존하는 모든 서책류. 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년(인종 23) 김부식(金富軾) 등이 삼국시대 문헌과 사서(史書)에 의거하여 편찬한 사서이다. 권4 신라본기(新羅本紀) 4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13년조 등에 울릉 지역과 관련한 기록이 보인다. 2. 『고려사(高麗史)』 독도와 관련한 기록은 「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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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하리 465번지 내에 위치한 크기 4.2×5.0m 가량의 자연암반석에 새겨진 각석문으로 문화재자료 제4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각석문은 1893년 당시 울릉도 수토관(搜討官)을 지낸 바 있는 조종성(趙鍾成)과 전 수토관 이규원(李奎遠), 영의정 심순택(沈舜澤)[1824~1906] 등이 울릉도에 이주한 주민들의 기아와 질병을 보살핀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각석문의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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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모든 행위. 교육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 등을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 주는 일이다. 근본적으로 상대편 인간에게 영향을 끼쳐서 가치 있는 모습으로 성장하게 하는 사회 기능이다. 일반적으로 교육이란 교사가 학교라고 하는 정비된 기관에서 계획적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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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에 속하는 행정리. 1882년(고종 19)에 울릉도 개척령이 반포되면서 주민이 입도하기 시작하여 이곳에 자치지휘소를 설치하고 도방청이라 불렀다. 그 이후 이규원의 일기에서도 도동을 도방청포구(道方廳浦口)라 기록하고 있으며, 도방청은 번화한 곳을 가리켰으며, 이후 도방청의 도(道)자를 따서 도동(道洞)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태하에 있던 군청이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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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에 속하는 행정리. 1882년(고종 19)에 울릉도 개척령이 반포되면서 주민이 입도하기 시작하여 이곳에 자치지휘소를 설치하고 도방청이라 불렀다. 그 이후 이규원의 일기에서도 도동을 도방청포구(道方廳浦口)라 기록하고 있으며, 도방청은 번화한 곳을 가리켰으며, 이후 도방청의 도(道)자를 따서 도동(道洞)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에 태하에 있던 군청이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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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에 속하는 행정리. 1882년(고종 19)에 울릉도 개척령이 반포되면서 주민이 입도하기 시작하여 이곳에 자치 지휘소를 설치하고 도방청이라 불렀다. 그 이후 이규원의 일기에서도 도동을 도방청포구(道方廳浦口)라 기록하고 있으며, 도방청은 번화한 곳을 가리켰으며, 이후 도방청의 도(道)자를 따서 도동(道洞)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에 태하에 있던 군청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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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울릉도 개척을 주관하기 위해 현지 관리인을 임명하여 운영한 제도. 1882년 8월 20일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은 울릉도에 대한 개척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 과정에서 만약 개척을 담당할 현지 관리인이 없으면 잡폐를 방지하기 어려우니 근실하고 일 잘하는 사람을 검찰사에게 문의하여 도장(島長)으로 임명해서 파견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어 도장제가 실시되었다. 1882년 8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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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에 속하는 독도는 대한민국 최동단에 있는 섬이다. 삼봉도(三峰島)·우산도(于山島)·가지도(可支島)·요도(蓼島)등으로 불리다가 1881년(고종 18)부터 독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독도가 주목받는 것은 한국 동해의 가장 동쪽에 있는 섬이라는 지리적 요인이 작용한 점도 있지만, 특히 한·일 양국간 영유권 분쟁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독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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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일본 선박 만리환이 울릉도의 규목(槻木)[느티나무]을 반출한 사건. 1883년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로서 울릉도 개척의 선봉장이었던 김옥균은 1883년 6월 국왕의 위임장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서 국채를 모집하려 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와 민비 수구파의 사주를 받은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가 김옥균이 휴대한 고종의 국채위임장을 위조한 것이라고 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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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만디에서 이쪽이 저동이라 카는데, 옛날에 모시가 마이 났다고 하는 기라요. 현 도동 3리는 큰모시라 카고, 저동 1리를 중간모시, 내수전 가는데 저동 2리를 작은 모시, 저동3리는 내수전이라 캐요.” 저동(苧洞)은 ‘모시풀’이 많이 자라고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개척 당시, 갯벌에 모시가 많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모시개’라고 불렀다. ‘모시가 많은 갯벌(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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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에 있는 역사적·문화적·학술적 가치가 있는 유형·무형의 소산들. 문화재는 크게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천연기념물로 분류할 수 있다. 1962년 1월 10일에 제정된 우리나라의 「문화재보호법」에서는 유형문화재를 건조물과 전적(典籍)·서적·고문서·회화·조각·공예품 등 유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큰 것과 이에 준하는 고고 자료라고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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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1리에 속하는 마을. 예전 이 곳에는 석빙고가 있었으므로 빙고골 또는 빙구골이라 불렀다. 지금은 빙구골 또는 빙구골짝이라 부르게 되었다. 1910년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의하면 이 곳의 지명을 사공넘이[沙工里]로 표기하고 있다. 이규원(李奎遠)[1833-?] 일기에는 죽포(竹浦)로도 되어 있는데, 아직도 대나무가 많이 남아 있다. 현재는 사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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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1리에 속하는 마을. 사공이 넘어 가는 곳이라는 뜻에서 사구너미라고 하였다는 설과 큰 뱀이 산을 타고 넘는 듯하고, 또 이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뱀 입아귀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사구내미[蛇口南]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1910년 『조선지지자료』에 의하면 이 곳의 지명을 사공넘이[沙工里]로 표기하고 있다. 이규원(李奎遠) 일기에는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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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지역에서 육지의 표면이 주위의 땅보다 높게 솟아 있는 부분. 울릉도 섬의 중앙부에는 동남쪽으로 편재한 울릉군 최고봉인 성인봉[983.6m]이 솟아 있고, 그 주변에는 500~900m 안팎의 대소봉과 연해 있다. 성인봉에서 산맥이 세 방향으로 뻗어 있는데 성인봉~가두봉(可頭峰), 성인봉~두루봉, 성인봉~대풍령의 삼능선이 주맥을 이루고 있다. 이 주맥은 울릉도를 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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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4월17일 날 제사를 지냅니다. 그 날이 3월 초하루거든요. 한 열흘 남았네. 그러면 그날 제사 지낼 때 성하신당 제사 지내고, 해신당 지내고, 초등학교 뒤에 천제당 지내고. 이규원 사적비 뒤에 보면 있습니다. 천제당이라고 있어요. 원래는 서달영에 법화당이라고 있었어요. 우리 어릴 때까지 사당은 있었는데 관리를 안 하다보니까 풍우에 다 찢겨서 터만 남았는데,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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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이 동네 사람들이 줄어들어서. 어떻게든지 인구를 유입할 수 있는 그런 게 있어야 하는데……. 그런 아마, 관광계획을 해서라도 자꾸 끌어들이는 것을 만들어야……. 위에 학교터에다가 이규원 감찰사, 그리고 사택 옆에 팬션을 짓는다는데, 모르겠어요. 너무 가파른데 어떡할려나. 요기 학교에서부터 교회 앞으로 해서 사택 넘어가면 해신당 가는 길이 있는데, 요길 아마 길을 낼 거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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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경상북도 울릉군의 역사. 울릉도의 경우 일제강점기인 1917년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에 의해 처음 유물의 채집이 있은 이후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 등의 조사가 있었다. 해방 후 국립박물관에 의해 울릉도의 고고학적 조사가 실시되었다. 1947년과 1957년에 김원룡 등에 의해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졌고, 1963년에 김정기에 의해 보충 조사가 실시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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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고종 37) 6월 우용정이 저술한 울릉도 조사 보고서. 우용정(禹用鼎)이 울릉도 시찰위원으로 임명된 후, 1900년 5월 25일 인천항을 향해 출발하여, 5월 27일에 일본 경부 1명을 태우고 인천을 출발, 부산항에 도착해서 5월 30일 감리서주사 김면수와 부산해관 세무사 라포트(E. Raporte, 羅保得) 및 봉판 김성원(金聲遠)과 일본 부영사보 아카쓰카 쇼스케[赤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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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에 있는 지방 자치 행정 기관. 울릉군청은 아름다운 국제 관광 휴양 섬 건설을 목표로 미래를 위한 지역 개발, 특색 있는 관광 명소, 신비의 섬 환경 보전, 정이 깃든 사회 복지, 발로 뛰는 현장 행정을 군정 구호로 정하고 업무에 임하고 있다. 경상북도 울릉군의 행정과 자치업무 등을 담당하기 위하여 설립된 기관이다. 1882년(고종 19) 이규원이 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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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9월 오성일을 울릉도도감으로 임명하는 임명장. 1882년 이규원(李圭遠)[1833~?]이 울릉도를 개척한 이후 도장(島長)에 전석규(全錫奎)가 임명되었다. 1884년 전석규가 비리로 파면되자 같은 해 삼척영장이 울릉첨사를 겸하였고, 얼마 후 평해군수가 울릉첨사를 겸하였다. 1888년 2월에 첨사제를 도장제로 바꾸어 평해군 월송진(越松鎭)에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두어 울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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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고종 20) 이규원이 저술한 울릉도 검찰일기. 1881년(고종 18) 울릉도 수토관(搜討官)은 일본인들이 울릉도의 규목을 몰래 베어 가는 등 울릉도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강원감사에게 보고하였고, 강원감사는 이 사실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일본 정부에 항의 공문을 발송하게 하는 동시에 대책 마련을 위해 부호군 이규원(李奎遠)을 울릉도검찰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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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각석문. 울릉도 태하리 광서명 각석문은 시기를 달리하는 두 개의 글이 새겨져 있다. 먼저 전 수토관 이규원(李奎遠), 영의정 심순택(沈舜澤)[1824~1906] 등이 울릉도에 이주한 주민들의 기아를 진휼(賑恤)한 것에 고마움을 표시하며 새긴 글과 1893년 당시 울릉도 첨사를 지낸 조종성(趙鍾成)의 공적을 기리는 글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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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각석문. 울릉도 태하리 임오명 각석문은 1882년(고종 19) 5월 검찰사 이규원(李奎遠)이 조정의 명을 받아 울릉도 내 경작이 가능한 지역을 답사하고, 무단으로 왕래하는 일본인들의 실태를 파악하도록 파견되어 체류하고 있을 때 새긴 것이다. 자연 암벽의 평탄면에 각자한 것으로 글자의 크기는 10㎝ 내외이며, 서로 5m 가량 떨어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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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4월) 27일 평해읍(平海邑)에서 10리쯤 떨어진 구산포(邱山浦)에서 바람을 기다리다가 29일에 순풍(順風)을 만나 중추원도사(中樞院都事) 심의완(沈宜琬)과 군관출신(軍官出身) 서상학(徐相鶴), 전수문장(前守門將) 고종팔(高宗八),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유연호(劉淵祜)와 사공, 격군 등 82명, 포수(砲手) 20명을 3선(船)에 나누어 싣고 당일 오전 8시쯤에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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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지역에서 주민 수 또는 인간집단. 인구란 한나라 또는 일정한 지역 안에 사는 사람의 수를 말하는 것으로 울릉군의 인구는 울릉군의 주민등록상 등록되어 있는 사람의 수로서 독도의 인구도 포함하고 있다. 울릉군의 인구는 1974년 29,810명을 최고 정점으로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이며, 2000년대에는 인구 감소 추세가 완화되기는 하였으나, 현재 9,000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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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에서 지표상의 인문적 요소를 분석 대상으로 지역의 의의를 일반적으로 고찰, 연구하는 학문 분야. 울릉군의 총 면적은 72.82㎢로 경상북도 전체면적 19,440.7㎢의 약 0.37%에 해당되고 우리 나라 군 중에서 가장 면적이 작은 군이다. 면적 중 경지 면적은 12.97㎢로 18%이고, 임야 면적은 55.48㎢로 76%이다. 각 읍·면별 크기는 서면이 27.20㎢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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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에서 나무를 재배하고 벌채하고 목재를 생산하는 산업. 1. 고려 시대 울릉군의 임업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일찍이 찾아 볼 수가 있다. 『고려사(高麗史)』 1141년(인종 19) 기사에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로 임명된 이양실(李陽實)이 사람을 울릉도로 보내 사정을 살피게 하였는데, 그가 가져온 것 중 본토 내에서는 볼 수 없는 과핵(果核)과 목엽(木葉)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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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일본인이 울릉도에서 벌목을 한다는 사실을 고한 문신. 본관은 금성(錦城). 자는 익여(翼如), 호는 송석(松石).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임기진(林箕鎭)이다. 1846년(헌종 12) 식년시에 병과로 급제한 뒤 1848년 정언·교리·종부시정(宗簿寺正)을 지냈다. 1863년(철종 14) 경상감사 김흥근(金興根)이 철종에게 무례를 범했는데도 언관들이 논핵하지 않았다고 하여 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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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으로 전에는 동네에 제사 지내는 날짜를 바꾸기 전에는 음력으로 정월보름날하고 삼월삼짇날 새벽에 제사 지냈어요. 정월보름은 동제를 모셔요. 태하동 같은 경우에는 저위에 이규원 사적비(광서명각석문) 있는데 그곳에 천제당이 있고, 초등학교 뒤에 산신당 있어요. 거기는 동네 제사를 정월보름날 지내고, 성하신당하고 여 해신당이라고 있어요. 거기는 삼월삼짇날 어민들이 지내는데 지금은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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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울릉도 역사. 울릉도는 고려 말 왜구 때문에 무인도가 되었으나, 조선 초 이래 육지의 백성들이 계속 건너가 살았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울진현(蔚珍縣)에 소속되었지만, 이곳이 왜구의 거점이 된다고 하여 조선 전기에는 쇄환정책(刷還政策), 조선 후기에는 수토정책(搜討政策)을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본토로부터 울릉도에 들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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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3월 1일 일본 태정대신이 발급한 일본인의 울릉도 도항을 금지하는 문서. 일본에서 송도(松島)[竹島]라 부르고, 조선에서 울릉도(蔚陵島, 鬱陵島)라 부르는 곳에 일본인들의 도항(渡航)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각 지방관에게 하달(下達)하여 이를 준수토록 한 지령이다. 문서의 크기는 19.5×29.5㎝이다. 1882년 4월 조선 정부는 울릉도검찰사(鬱陵島檢察使) 이규원(李圭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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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창은 천부리의 중심이다. ‘예(옛날)부터 선창’이라 하여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왜선들이 들어와 이곳에서 배를 만들고 고기를 잡고 귀목(느티나무)을 도벌하여 갔기 때문에 왜선창이라도 불렀다. 이규원 일기에는 ‘왜선창’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동명을 한자식으로 바꿀 때, ‘천부’라고 이름하였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 바다 건너 살 곳 찾아 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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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곳에는 황토가 많이 났다고 한다. 지금도 현포 쪽 바닷가 산에 황토를 파낸 자취가 아직 남아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조 때는 이곳의 황토를 나라에 진상했다고 하며, 또 조정에서는 3년에 한 번씩 삼척영장을 이 섬에 순찰 보내어 그 순찰 여부를 알기 위해서 이곳의 황토와 향나무를 바치게 했다고도 한다. 개척 때 사람들이 이곳에 와 보니 바닷가 산에 황토를 파낸 구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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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북면 천부1리에 있는 폭포. 개척민들이 입도하여 처음 나리분지에 있는 이 폭포를 보니 맑은 물이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것이 퍽 시원해 보였고, 또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천 년까지 장수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폭포 이름을 천년포라고 불렀다 한다. 1882년 울릉도 검찰사로 울릉도를 검찰한 이규원의 『검찰일기(檢察日記)』와 1917년 「조선지형도」에서는 한자로 ‘천년포(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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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리에 속하는 행정리. 울릉도 개척 때 사람들이 현 태하리에 와 보니 바닷가 산에 황토를 파낸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큰황토구미라 하였던 것이다. 뒤에 한자식 지명으로 표기할 때 대하(臺霞)라 하다가 다시 태하(台霞)라 표기하였다. 본래 북면의 지역인데, 순종 원년에 서면에 편입되었다. 1906년 지방행정 구역을 정리하면서 남면의 남양·석문·통구미·남서·구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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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면 태하리 507번지 일대, 태하초등학교 뒤편 산비탈에 있는 서석태씨 밭에서부터 동편으로 250m 지점에 있는 태하리 천제당 부근까지의 밭과 산비탈에 위치해 있다. 1882년 이규원의 '울릉도 검찰일기(鬱陵島 檢察日記)'에 따르면 대황토구미(지금의 태하리)에서 여러 기의 고분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 서석태 씨 밭에는 고분 1기가 남아 있다. 고분은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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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석문은 옛날 울릉도에서 이쪽(방파제 방향) 저쪽(황토구미 쪽)에 양쪽에 발파를 해가 없애버렸지만, 음각을 해가 수없이 있었어요. 이쪽저쪽 참 많이 있었는데, 발파를 해가 다 없애버렸어요. 이쪽(방파제 쪽) 한군데는 남아 있더라고. 저쪽은 다 도동항구 만든다고 발파를 해가, 한 20년 되었어요.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경사져 있었어요, 지금은 단애가 되어 있지만.”(제보자: 안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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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하마을, 옛날에는 황토구미라고 불렀던 곳이다. 조선 태종~세종조 우산무릉등처 안무사 김인우를 시작으로, 조선후기의 삼척 영장, 월송 만호 등의 수토관, 그리고 1882년 이규원 검찰사가 울릉도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태하마을이었다. 그들이 울릉도를 다녀간 흔적들이 바위에 새겨져 남아 있다. 태하마을은 울릉도 수호신을 모시는 성하신당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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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에서 개척 시기에 사용된 풍력을 이용한 배. 풍선은 선체 위에 세운 돛에 바람을 받게 해서 진행하는 배이다. 경상북도 울릉 지역에서는 개척 시기에 이주민들이 타고 온 나선[전라도 어선]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문헌에 따르면 풍선의 유래는 개척 시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2년 울릉도를 검찰한 이규원의 검찰일기를 보면 전라도와 강원도 사람들이 울릉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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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2리에 속하는 마을. 조선시대 이규원의 일기를 보면 마을 뒤편 학이 앉아 있는 형태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학포(鶴圃)라고 하였는데, 1958년경 학의 부리 부분이 바람에 떨어지고 몸통만 남았다고 한다. 이곳은 태하1리와 마찬가지로 황토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나, 태하1리 보다 면적이 좁고 황토가 적다고 해서 작은 황토구미(黃土邱尾)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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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면 태하 2리(학포, 작은 황토구미)의 산왕각은 태하리 임오명각석문에서 남쪽으로 약 80m 지점의 계곡 옆 암반 사이에 정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당집은 단칸(2.5×2.7m) 규모로 뒷벽은 바위에 의지하고 나머지 삼면은 돌로 벽체를 쌓아 올렸다. 당집 주변은 시멘트로 바닥을 정리하고 벤치를 놓아 마을쉼터로 조성하였다. 출입문은 계곡 쪽으로 쌍여닫이 판자문으로 달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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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리와 북면 현포리에 있는 고개. 이규원 일기에는 향목구미라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향나무가 별로 없지만, 개척 때에는 이 산등성이 일대에는 잡목이라고는 별로 없고, 오직 아름드리 향나무만이 꽉 차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면의 북서쪽에 있으며, 서쪽 태하등대 근처에는 향나무 자생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울릉읍 도동 선착장 부근의 소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