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14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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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沈熏-筆耕舍-常綠樹精神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부곡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구자경 |
[정의]
필경사는 일제 강점기에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부곡리에서 창작 활동을 한 작가이자 영화인, 저널리스트 심훈의 자택.
[개설]
심훈(沈熏)은 일제 강점기에 문단 활동을 했던 작가이자 영화인, 그리고 저널리스트이다. 심훈의 「상록수」는 우리 나라 현대 문학에서 농촌 계몽을 소재로 하고 있는 소설의 백미(白眉)라 불린다. 그만큼 소설 「상록수」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아픔의 역사를 겪은 우리 민족에게는 희망이자 이상이었다. 심훈은 곡절이 많은 삶을 살았지만 그가 끝까지 버리지 않았던 것이 바로 ‘민족’이었다. 조선 민족으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을 때 심훈은 과감하게 저항하였다. 또 직접 맞서 싸울 힘이 없다고 느꼈을 때는 현실을 과감하게 외면해 버렸다. 그리고 종이 위에 세계를 갈면서[筆耕] 활자의 위력으로 현실을 반성하고 극복하려 했다. 작가로, 영화인으로, 저널리스트로,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 필경(筆耕)이다. 그리고 그렇게 갈아 낸 밭이 바로 「상록수」이다.
[불의한 세상에 저항한 소년 ]
심훈은 1901년 9월 12일 경기도 시흥군 신북면 흑석리[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서 아버지 심상정과 어머니 해평 윤씨의 3남 1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심훈의 아버지 심상정은 1871년생으로 서울 노량진에 있던 은로 보통학교 교장직을 맡았고 경기도 시흥군 신북면장을 역임했다. 1930년 심상정은 어머니의 친정 집안이 있던 당진의 송악읍 부곡리로 내려갔다. 그리고 1950년 사망할 때까지 부곡리에서 풍족한 삶을 살아갔다. 심훈은 1915년 교동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제일 고등 보통학교[경성 제일 고보]에 입학하여 학교생활을 하다가 1917년 3월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혼인한다. 이해영의 아버지 이건용은 한말(韓末)에 군수를 지냈던 사람이다. 그런데 외아들 오빠 이해승(李海昇)이 왕족[철종의 후예] 후작으로 양자가 되는 바람에 아버지 이건용은 다른 양자를 맞아들였다. 즉 심훈이나 이해영의 집안 모두 당대를 호령할 만큼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집안이었다. 그런데 심훈은 경성 제일 고보 3학년 때인 1918년 일본인 수학 교사와 사이가 나빠 수학 시험에 백지 답안지를 내고 수학 과목 낙제로 유급 처분을 받았다. 일본인 수학 교사는 당시 대개의 일본인처럼 우월감이 강했고 한국인 학생을 마치 야만인 대하듯 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학생을 지명해 질문을 하고 대답을 못 하면 전체 한국인에게 욕설을 서슴지 않았다. 이런 수학 교사의 태도에 심훈은 물러서지 않고 맞서 대들었고, 학교는 이런 심훈의 사상을 의심하며 유급이라는 가혹한 벌을 내린 것이었다. 심훈은 경성 제일 고보 4학년 때인 1919년 3월 5일 서울 각급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서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3·1 운동 기간 중,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 규모의 시위운동이 바로 남대문역 만세 시위운동이다. 이 만세 시위운동은 3·1 운동 학생 대표였던 보성법률 상업 전문학교 강기덕과 연희 전문학교 김원벽 등이 주도하였다. 심훈을 비롯한 서울 지역의 학생 대부분과 광무황제의 인산을 마치고 귀향하던 지방 유생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심훈은 이날 만세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민족 독립의 열기를 맘껏 분출하다가 조남천, 손덕기, 최강윤 등 같은 학교 학생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경성 감옥[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 사건으로 심훈은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심훈은 1919년 8월 30일 경성 지방 법원의 예심 종결 결정을 거쳐 정식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리하여 1919년 11월 6일 경성 지방 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 유예 3년을 받았다. 이에 따라 석방되었지만, 이미 미결 기간까지 포함하여 약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뒤였다. 옥중에서도 심훈의 민족 독립을 향한 결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심훈이 투옥 중, 어머니를 위로하고 조국 독립에 대한 결의를 다진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이라는 옥중 편지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심훈은 감옥에서 나온 뒤 다섯 살 위인 이희승(李熙昇)에게 한글 맞춤법을 공부하고, 1920년 아내의 도움을 받아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 즈장 대학[之江大學]에서 극문학을 공부하고 1923년 귀국하였다. 심훈의 아내 이해영은 원래 이름이 없었다. 심훈은 중국에 있는 기간에 편지로 집안 어른에게 간청하여 부인을 진명 여자 보통학교에 입학시키고, 이름도 항렬자 ‘해(海)’ 자에 ‘영(暎)’ 자를 붙여 ‘이해영(李海暎)’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청년 심훈의 고뇌-영화에 미치다]
1923년 중국에서 귀국한 심훈은 문예에 뜻을 가진 청년들과 신극 연구 단체인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결혼 7년 만인 1924년 여름, 아내 이해영과 이혼하였다. 표면적 이유는 자식이 없어서라 하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이해영은 이혼 후 재가하지 않고 죽을 때[1971년 1월 14일 사망]까지 심훈을 정신적인 남편으로 섬기며 살았다고 한다. 1924년 10월 심훈은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한다. 입사 동기로 김동환, 유환희, 김경집, 남훈익 등이 있었다. 입사 8개월 만인 1925년 5월 22일 심훈은 임금 인상을 내걸고 동료 기자들과 동맹 투쟁을 하다가 집단 파면을 당하였다. 이른바 ‘철필 구락부 사건’이다. 심훈은 『동아일보』 재직 중이던 1925년 조일제가 번안한 「장한몽」이 영화화 될 때, 이수일 역을 맡았던 주연 ‘주삼손’이 촬영 도중 행방불명되자 이경손 감독의 발탁으로 후반부 주연을 맡았다. 영화에 관심이 깊었던 심훈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 무렵 심훈은 시작(詩作) 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192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소설 「탈춤」을 써 1926년 11월 9일부터 12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 34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심훈(沈熏)’이라는 예명도 이때부터 쓰기 시작하였다. 영화에 대한 심훈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1927년 2월 계림 영화 협회 소속 강흥식과 일본으로 건너가 6개월간 영화 공부를 하였다. 이때 심훈은 닛카쓰[日活] 촬영소에서 제작했던 ‘춘희(椿姬)’라는 일본 영화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출연하였다. 이 영화는 1928년 서울에서도 상영되었다. 일본에서 귀국한 심훈은 ‘먼동이 틀 때’를 제작하고 이후로도 신문에 국내외 영화 평론을 연재하는 등 영화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민족의 부름에 응답하다]
1930년대 접어들면서 심훈은 우리 민족의 현실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1930년에 쓴 「풀밭에 누워서」는 만주 땅으로 쫓겨나 핍박 받으며 비참하게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실상을 표현하고 있다. 1930년 10월 29일부터 12월 10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동방의 애인」도 39회를 끝으로 중단되었다. 「동방의 애인」에서 일제의 관리들은 ‘버러지 떼’와 같은 멸시의 대상으로 묘사되었다. 일제 식민 지배 치하에서 공개적 신문지상에 정부 관리를 비하하는 표현을 가감 없이 써낸 것을 보면 심훈의 항일 의식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첫 번째 결혼을 실패한 후 1930년 ‘다알리아’ 합창단원 출신인 안정옥(安貞玉)과 결혼하고 서울 평동에서 셋방살이를 하며 1932년 4월 27일 큰아들 재건(載健)을 낳았다. 1931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둔 심훈은 곧 경성 방송국 제2방송[우리말 방송] 문예 담당 프로듀서로 들어갔다. 그러나 1932년 1월 31일 그만두고 1932년 9월 심훈은 그간의 시들을 묶어 시집을 출간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검열로 뜻이 좌절되자 심훈은 부모가 있는 당진으로 항하였다. [심훈의 시는 1949년 심훈의 작은형 심명섭의 주선으로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집이 발간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제2의 고향 당진에서 글밭을 갈다[筆耕]]
심훈은 일제의 탄압과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부모가 있는 충청남도 당진으로 내려갔다. 심훈의 이사 시기에 대해서는 1932년이라는 의견과 1933년이라는 등 이견이 많다.[큰아들 재건을 낳고 바로 이사했다는 것보다는 이듬해 이사했을 것이라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당진에 내려간 심훈은 아버지의 집 사랑채에서 머물렀다. 당시 심훈은 조선일보사와 경성 방송국 퇴사로 경제적인 어려움도 겪고 있었다. 심훈은 당진에서 작품 활동에 전념하였다. 이때 쓴 소설이 「영원의 미소」[원제: 봄의 서곡]이다. 이 소설은 1933년 7월 10일부터 1934년 1월 10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171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어서 「황공의 최후」라는 단편도 탈고하였다. 심훈은 1933년 8월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임명되어 아내와 아들을 당진에 두고 홀로 서울에 올라갔다. 그러나 4개월 만에 다시 당진으로 내려가 아버지의 배려로 1934년 자신의 집을 지었다. 집의 이름을 자신의 시 「필경(筆耕)」에서 착안하여 ‘필경사(筆耕舍)’라 지었다. 조선인들의 마음을 붓으로 논, 밭 일구듯 표현하고자 하는 심훈의 의지를 담아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심훈의 수필 「필경사 잡기(筆耕舍雜記)」에 의하면 1934년 장편 「직녀성(織女星)」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고 그 고료를 받아 손수 설계하여 집을 지었다고 한다. 심훈은 필경사에 살면서 둘째[재광]와 셋째[재호] 아들을 낳고 창작 활동에 전념한다. 1935년 4월 1일 동아일보사에서는 창간 15주년을 맞아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벌였다. 이때 ‘동아상(東亞賞)’을 제정하여 사회적 공로자들을 표창했고, 농촌 문제에 대한 5편의 논문에 100원씩의 현상금을 걸어 공모하여 신문에 발표했다. 또한 500원의 파격적인 현상금으로 농어촌 문제와 관련된 장편 소설을 공모했다. 여기에서 심훈의 「상록수」가 당선되어 8월 13일자 『동아일보』에 발표되었다. 「상록수」는 1935년 9월 10일부터 1936년 2월 15일까지 127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심훈이 「상록수」를 쓰게 된 데에는 어느 날 읽게 된 신문 기사가 계기가 되었다. 심훈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 산골에서 농촌 운동을 하다가 과로로 숨진 최용신의 신문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당진 부곡리에는 경성 농업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향에 돌아와 농사 개량과 문맹 퇴치 운동을 벌이던 장조카 심재영이 있었다. 두 사람을 모델로 「상록수」의 스토리가 만들어졌다. 「상록수」에 담겨 있는 브나로드 운동의 정신은 식민지 현실에서 핍박받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궁핍함 그 자체였던 농촌에 대한 계몽 의식에 심훈의 항일 정신이 결합한 작품이기에 시대적 가치도 그 어떤 것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1936년에 쓴 「오오, 조선의 남아여!」는 ‘백림(伯林) 마라톤에서 우승(優勝)한 손, 남 양군(孫, 南 兩君)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주에서 우승한 손기정과 3위를 차지한 남승룡을 축하하며 쓴 시이다. 이 시는 식민지 조선 민중의 설움을 위로하기 위해 1936년 8월 10일 『조선중앙일보』 호외 이면에 단숨에 썼다고 한다. 한편 「오오, 조선의 남아여!」는 심훈이 생전에 남긴 마지막 글[絶筆]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가장 암담했던 시대에 올림픽 마라톤 우승이라는 소재를 통해 민족적 자존심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936년 8월 말 상경한 심훈은 「상록수」 단행본 발행을 위해 한성 도서 주식회사에서 작업을 하다가 과로와 장티푸스로 쓰러졌다.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1936년 9월 16일 오전 8시 경성 제국 대학 의학부 부속 의원에서 사망하였다.
['상록수'로 상록수 정신을 말하다]
심훈의 「상록수」를 통해 볼 수 있는 ‘상록수 정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상록수 정신은 애향, 애족, 애국정신이다. 「상록수」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헌신, 봉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농촌과 나라를 사랑하는 열정을 독자들에게 불러일으켰다.
둘째, 상록수 정신은 농촌, 농민, 청소년을 계도하고 일깨운 사랑의 정신이다. 피폐한 농촌을 구하고 농민과 청소년을 사랑하여 교육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랑의 실천이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셋째, 상록수 정신은 개척의 정신이다. 감시와 사찰 속에서도 농민들 속으로 파고들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피땀 흘려 새 역사를 만들어 가는 모습에서 독자들의 피를 뜨겁게 만들었다.
넷째, 상록수 정신은 희생과 봉사의 정신이다. 농촌의 열악한 환경과 무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굶주림에서 벗어나고 인간답게 살 수 있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있다. 자신을 내려놓고 약자를 보듬는 마음이 「상록수」의 근간에 깔려 있다.
다섯째, 상록수 정신은 협동 정신이다. 피폐한 농촌에서 주민을 괴롭히는 고리대금업자와 싸우기 위해 협동조합을 결성한다. 혼자의 힘이 아닌 모두의 힘으로 이루어 낸 결과이기에 더 가치 있는 일이었다.
이처럼 ‘상록수 정신’은 위기 상황에서만 필요하고 실천해야 할 정신이 아니라 일상에서 가져야 할 정신이다. 그런데 아무리 훌륭한 가치라 할지라도 그것이 정체되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가치를 발현하지 못할 수 있다. ‘상록수 정신’은 새로운 시대에 맞게 배려와 희생, 협동과 개혁의 정신으로 발전해야 한다.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치야말로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