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23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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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영어의미역 | Joseon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조선시대 논산의 역사.
[조선 전기]
1. 조선 건국
고려의 멸망 이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최대 관심사의 하나는 신 도읍을 정하는 것이었고 논산 계룡산 부근의 신도내는 고려시대의 남경이었던 한양과 더불어 그 유력한 후보지의 하나였다. 당시 논산의 계룡산 부근이 강력한 천도 지역으로 떠오른 이유는 권중화(權仲和)의 역할이 컸다. 권중화는 태조의 명으로 태실증고사로 왕실 안태의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양광·경상·전라도 등 여러 지역을 순회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순회를 마친 후 권중화는 왕실 안태지와 더불어 양광도 계룡산에 있는 신도내를 신 도읍의 후보지로 하여 그 지도를 올리게 되었다.
권중화가 올린 지도를 본 태조 이성계는 며칠 후 계룡산에 직접 행차하여 성석린(成石璘), 김주(金湊), 남은(南誾) 등에게 조운의 편리 여부와 도로 등의 형세를 살피게 하는 등 5일 동안 머무르며 직접 신도내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권중화가 올린 설계도와 그 형세를 확인한 후 신도내에 신 도읍 건설을 결정하고 김주, 박영충(朴永忠), 최칠석(崔七夕) 등에게 감독을 맡기고 돌아왔다. 이후 계룡산 신도내를 중심으로 신도읍 조성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1393년(태조 2) 12월에 이르러 돌연 중지되고 말았다.
이는 당시 경기좌·우도관찰사였던 하륜(河崙)의 반대 때문이었다. 하륜은 “도읍은 마땅히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치고 동·서·북면과는 멀리 떨어져 있으며 풍수적으로 보건데 물이 장생을 파하여 쇠패가 곧 닥치는 땅이다”라고 하면서 그 반대 이유를 상언하였다. 이에 태조는 권중화와 정도전을 통해 다시 조사하도록 명하고 신도내의 신 도읍 조성 공사를 중단하게 하였다. 그 후 많은 논란 끝에 조선의 신도읍지로 한양이 결정되었고 1년여에 걸쳐 진행된 천도 논의는 끝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등과 같은 지리지에 남아있어 그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2. 지방제도 정비
조선의 지방 제도는 초기에는 고려의 지방 제도를 답습하였으나 1413년(태종 13)에 개편을 시작하여 성종 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구체적으로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각 도마다 관찰사를 두었으며 그 밑으로 부(府), 대도호부(大都護府), 목(牧),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을 편성하여 각각 부윤(府尹), 부사(府使), 목사(牧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모두 중앙에서 파견되는 외관으로 충당토록 함으로써 중앙집권화를 도모하는 한편, 현(縣) 이하는 외관의 파견이 없어 자치적 조직을 이루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논산 지역은 은진현, 연산현, 니산현(노성현)으로 구성되어 행정적으로는 충청관찰사의 관할 구역으로 편성되었다. 당시 충청도 지역은 고려 말까지는 양광도라 칭해졌으나 1396년(태조 4)에 양주·광주 지역을 경기도로 이속하면서 청주를 관찰사의 감영으로 삼고 충청도라 개칭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행정구역의 모습을 갖추는 것은 1413년(태종13) 태종의 행정 개편의 단행으로 인한 것이다. 논산 지역은 공주목의 관할 지역으로 니산(노성)현, 은진현, 연산현의 3개 지역을 포함하였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총 호구 수 1,268호에 인구수는 모두 4,795명이었다.
한편 군사 제도는 크게 중앙군사제도와 지방군사제도로 나뉘며 지방군사제도는 세조 때 개편 정비한 진관체제를 바탕으로 짜여 있다. 진관체제는 행정조직을 군사조직으로 활용한 것으로 여러 진은 평상시에는 주진의 관할 하에 있지만 전시에는 각 진관이 독자적으로 군사 활동을 취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충청도는 공주, 충주, 청주, 홍주로 이루어졌으며 논산은 공주진영에 속해 있었다. 각 진의 지휘관은 별도 파견하는 것이 아니고 해당 지방의 수령이 이를 겸하도록 되어 있어 논산의 경우 은진, 연산, 노성의 현감이 절제도위를 겸하고 있었다.
진관체제의 병력은 16세 이상 60세의 정남으로 양인 농민들이었다. 양인 농민들은 평상시 농업에 종사하다가 일단 징발이 되면 서울로 올라가거나 지방의 진에 나아가 근무하였는데 논산 지역의 군정은 은진현 시위군 22명, 수호군 52명, 선군 258명, 연산현 시위군 9명, 진군 2명, 선군 162명, 니산현 시위군 28명, 수호군 19명, 선군 190명으로 총 742명으로 구성되었다.
3. 사회상
15~16세기 논산 지역에는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재해가 많았다. 당시 논산 지역에서 생긴 자연재해는 주로 지진, 황충, 큰 바람과 흙비 등으로 인한 재해였다. 또한 충청도 일대에 전염병이 돌아 니산에서만 10여 명의 사람들이 죽기도 하였다. 이러한 자연재해의 다발과 더불어 조선 전기 사회는 대체로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이에 당시의 지배층은 주로 유교를 통해서 이를 극복하려 하였으며 그 주된 방법은 충효열 관련자들을 선정하여 포상하는 것이었다.
논산은 충효열의 고장답게 특히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으며 1600년대 이전까지 모두 10명이나 포상을 받았다. 이중 대표적인 사람이 송지로의 처 허씨로 연산에 살면서 19세에 지아비를 잃고도 개가하지 않고 시어머니를 모시며 평생을 살아 정려를 하사받았다. 이후 명종 조까지 약 9명의 논산 사람들이 정려를 하사받았으며 조선의 윤리서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논산의 인물 7명이 효자도나 열녀도 등에 등재될 정도였다.
[임진왜란]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논산 지역 역시 왜군의 침략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1차 침입 때인 1592년의 경우 논산 지역은 왜군의 북상로에서 벗어나 있었던 관계로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그러나 2차 침입에서는 충청도 대부분의 지역과 더불어 논산 지역도 왜군과의 주요 격전지가 되면서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1596년 휴전협상이 결렬되자 왜군은 이듬해인 1597년(선조 30) 정월에 재침을 감행하여 남해·사천·고성·하동·광양·구례·남원을 차례로 점령한 후 전주에 집결하였다. 이중 좌군은 남쪽으로, 모리(毛利秀元)·가토(加藤淸正)·구로다(黑田長政) 등으로 편성된 우군은 충청도로 북진했다. 이에 같은 해 9월초 충청방어사 박명현 부대가 논산 지역의 여산·은진 등지에서 왜군을 맞아 종일 접전하면서 많은 적을 사살하였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후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논산 지역도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한편 두 번에 걸친 왜란과정에서 논산 지역에서도 많은 의병들이 배출되었다. 논산 출신의 대표적인 의병으로는 양함, 박이현, 양응춘 등이 있으며 이들은 후에 정려를 하사받고 자신들의 문중사우에 배향되었다. 또한 참혹한 상황에서도 열행을 행한 진진의 처 담양국씨, 박동민 처 전주이씨, 이공겸과 그의 처 민씨 등도 후에 정려를 하사받았다.
[조선시대 후기]
1. 행정구역 및 명칭의 변화
조선 전기에 고려시대의 행정구역을 정비하며 정착시켰음에도 불구 이후에도 행적구역은 잦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논산 지역의 경우 은진현, 연산현, 노성현이 하나로 합쳐지거나 다시 분리되기도 하였으며 노성현은 그 명칭이 여러 차례 바뀌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군현의 통폐합은 그 지역에 역적이나 강상의 죄인이 발생했을 때나 변란과 재해로 독립 군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을 경우에 주로 단행되었다. 그리고 이는 은진현, 연산현, 노성현으로 구분되던 논산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1646년(인조 24) 은진, 니산, 연산현은 통폐합되어 은산현으로 불린 적이 있었으며 이는 당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니산현 사람인 유탁(柳濯)이 모반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이후 은산현은 10년 만인 1656년(효종 7)에 이전의 행정구역으로 복귀되었다. 한편 노성현은 본래 ‘니산현’이었으나 1777년(정조 1)에 임금과 이름이 같다하여 노성으로, 그리고 1801년(순조 1)에는 다시 노성(魯城)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2. 동족마을의 발달
농업의 발달과 함께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농토가 대폭적으로 확대되었다. 농토의 확대는 농업 인구의 증가를 알려주기도 하지만 이들이 거주하는 마을이 형성되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에 따라 농경지를 확대하기 위한 사족들의 이거 양상도 나타나게 되는데 이들이 많은 노동력과 경제력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배경으로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농토의 확대를 꾀하게 되면서 동족마을을 성장시켰다.
친족이 모여 살던 마을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동성 문중을 중심으로 한 동족마을로 바뀌기 시작하는데 논산 지역에도 많은 동족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 후기 논산 지역에서 동족마을을 형성하였던 대표적인 문중은 일찍이 조선 초기부터 논산의 거족으로 이름 높았던 성씨 가문들이 대부분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연산의 가평이씨·성주도씨·광산김씨·전주이씨, 노성의 파평윤씨·무안박씨, 은진의 부여서씨 등이었다.
동족마을의 발달은 개별 동족마을을 중심으로 문중 활동의 활발한 전개를 촉진시켰으며 주로 족계 창립, 종가와 사당 건립, 서당과 학계 마련, 누정과 재실 건립, 서원·사우의 건립 운영, 족보와 선초 문집의 발간 등과 관련된 활동으로 나타났다. 논산 지역에는 이런 문중 활동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 사우, 영당, 사당, 재실등의 수가 많아 당시 어느 지역보다도 활발한 문중 활동이 전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논산의 사족 활동과 당쟁
조선 중기 빛을 발했던 충청도 사족들의 학맥은 대개 논산 출신의 사계 김장생이나 그의 아들 김집과 학연을 맺고 있다. 조선의 성리학은 16세기 퇴계와 율곡의 활약에 힘입어 주자성리학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갖게 되면서 조선 고유의 성리학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따라서 16세기 말엽에 이르러 성리학의 실천학으로서의 예학이 자연스럽게 주목되기 시작하였고 그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학파가 곧 ‘사계 예학파’였다.
‘사계 예학파’는 조선 예학의 태두인 김장생과 그의 적전 문하들에 의해 17세기 호서 지방에 형성된 전문적인 예학 연구파의 이름으로 이들에 의해 17세기 조선의 예학 시대가 주도되었으며 조선의 고유의 조선 예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적 성숙과 함께 이견이 발생하게 되면서 종국에는 주자성리학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되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대이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비판의 시발점은 백호 윤휴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의 새로운 이념의 주장이었으며 이로 인해 남인과 서인의 대립 속에 시작된 당쟁이 촉발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당쟁은 서인 내부에서도 노론과 소론이 분리되는 등 삼각관계로까지 전개되었으며 그 배경이 바로 논산이었다.
1680년(숙종 6) 남인의 처벌 문제로 서인이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리되었고 온건파의 윤증과 강경파인 송시열 사이에 치열한 당쟁이 전개되었으며 이를 회니시비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회니시비의 유산이 바로 연산의 돈암서원과 노성의 노강서원으로 17세기만 하더라도 대표적인 서인계 서원으로 서로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던 17세기 후반 이후 변모하여 양 서원에서 각자 자파의 의견을 수립하였고 시시비비가 갈려질 때 마다 영광과 상처로 우여곡절을 겪기에 이르렀다. 결국 돈암서원과 노강서원이 당쟁의 핵심 근거지가 되었으며 이는 예학의 중심지를 상징하는 논산의 팽팽한 긴장감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