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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저서당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500864
한자 中苧書堂
영어음역 Jungjeo Seodang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저동1리
시대 조선/조선,근대/근대
집필자 장두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서당|교육기관
설립연도/일시 미상
해체연도/일시 1943년연표보기

[정의]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저동1리에 있었던 사립 교육 기관.

[개설]

서당(書堂)은 향촌에 설립한 초·중등 사설 교육 기관으로 학당(學堂), 사숙(私塾), 학방(學房), 글방이라고도 한다. 서당 교육의 시초는 정확하지 않으나 서당의 사회적 의미가 증대한 것은 16세기 사림파의 등장과 함께 진행된 향약 보급 운동과 연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서당은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동네의 공회처 역할을 하였으며 향음주례를 주관하는 장소로도 제공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서당 교육이 민족 교육과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는 온상이라고 보고 1918년 ‘서당규칙’을 공포하는 등 여러 가지 탄압 정책으로 서당을 말살하였다. 중저서당은 울릉도에서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서당으로 경상북도 내에서 수백 명의 문도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울릉도에서 추앙을 받는 한의 김하우(金夏佑)와 민의원에도 당선되고 보건소장을 겸임한 바 있는 의사 전석봉(田石鳳)과 같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변천]

정확한 설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서당 건립 당시 육지에서 방모(方某)를 훈장으로 초빙하였다. 3년 후에는 김홍기가 훈장으로 있다가 2년 후 서면 학포로 이주한 후 후임으로 내수전에서 훈장을 하고 있던 손순섭(孫純燮)이 훈장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서당에서도 일어를 가르치라는 일본 경찰의 압력으로 중저서당 출신인 김영수(金永洙)를 접장(接長)으로 기용하였으나, 일어 교습은 형식적으로 이루어졌다.

대신 학동들에게 조국의 광복을 역설하여 가르치다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훈장이 고초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한학을 가르쳤으며, 서당 폐쇄를 강요함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지속하다가 1943년 일본 경찰의 압력으로 폐쇄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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