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828 |
---|---|
한자 | 儒敎 |
영어음역 | Yugyo |
영어의미역 | Confucianism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인영 |
[정의]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의 유교의 연원과 전개 현황.
[개설]
수천 년 동안 중국과 한국, 일본 등 동양사상을 지배하여 온 유교는 인(仁)을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 이념으로 삼고,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이며 정치학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볼 때는 종교의 범주에 넣어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초월적 믿음의 대상이나 내세관, 종교적 의식이나 교단조직 등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기능이나 역할 등이 종교와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언제 들어왔는지는 정확지 않으나 삼국시대부터는 어느 정도 일반화되어 교육이나 정치의 지배이념으로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정교(政敎)의 지배이념으로 등장하게 되며, 고려시대에는 정치의 실천적 지도이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국교(國敎)로서 그 위치와 역할이 더욱 확고해진다.
[전래]
용인 지역의 경우 언제 유교가 들어왔고, 어떻게 계승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용인에서 살았던 인물들의 면면을 통해 고려시대에 이미 유교가 들어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용인현 우거조에 보면, “고려 이석지(李釋之)가 살았다. 본조(本朝)에 이석지의 손자 이종검(李宗儉)·이종겸(李宗謙) 두 사람이 일찍부터 벼슬에서 물러나 남곡에서 살면서 효우당을 짓고 산수 풍경을 즐기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용인현 산천조에 “남곡은 30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1377년(우왕 3)에 지은 「남곡기(南谷記)」에, “용구 동쪽에 남곡이 있는데, 나와 같은 과방(1341년)에 오른 이선생이 산다. 그는 가정 이곡의 문생으로 급제하여 정언을 거쳐 삼품에 올랐다.”고 하였다. 이어서 이석지가 끼친 사랑은 백성의 마음에 남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석지가 유학을 공부한 인물임이 분명하며, 이석지의 손자들 역시 조선조에서 벼슬하다 물러나 용인에서 살았다는 것으로 미루어 용인에 유교가 전래된 것은 고려 후기일 가능성이 높다.
[향교와 서원]
용인 지역에 유교가 뿌리를 내린 것은 문묘를 받드는 향교라는 교육기관이 설립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용인에 향교가 건립된 것은 조선 전기인 1440년(정종 2)으로, 용인현 치소에 건립된 용인향교가 처음이다. 양지향교는 이보다 훨씬 후기인 1518년(중종 13)에 건립되었는데, 이로써 용인 지역에도 유교를 숭상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향교와 더블어 유교의 교육기관으로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유학의 근간을 이루었던 서원이 용인 지역에 처음 세워진 것은 1576년이다. 이계(李啓)와 이지(李贄)가 용인의 모현촌 죽전동(현 수지구 죽전동)에 사당을 짓고, 정몽주(鄭夢周)와 조광조(趙光祖)의 신위를 봉안하고 향사를 받들었던 충렬사(忠烈祠)가 그것이다. 한편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서 용인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자리잡은 충렬서원과 심곡서원, 한천서원 등에서는 많은 유학도들이 배출되었는데, 이는 서원을 중심으로 수준 놓은 유교 교육이 행해진 데 따른 결과였다.
[학맥과 명현]
용인 지역 유림의 학맥은 용인향교와 양지향교에서의 문묘를 중심으로 한 공교육과 충렬서원·심곡서원·한천서원 등의 사립 교육기관이 중심이 되어 이어져 왔다. 이들 학풍의 근간은 포은 정몽주의 이학(理學)에 근거한 것으로, 이는 조선 후기까지 용인 유림의 사상적 기조가 되어 왔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정몽주의 사후 연고지였던 용인은 그의 사상과 학문을 따르는 유림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 성리학의 종주로서 정몽주의 사상과 학문적 영향은 길재(吉再)를 거쳐,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 등으로 학통이 이어졌다.
정암 조광조는 생전에 용인에 살면서 사은정(四隱亭)을 중심으로 음애 이자 등의 선비들과 경(耕)·신(薪)·조(釣)·채(菜)의 낙을 즐기면서 “나라의 문명을 높이고 부강케 하며 밝은 임금이 되게 하고 어진 백성이 되게 하자”는 정치이념을 정립하였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도학을 근거로 하는 철인지치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포부가 있었다. 조광조의 이러한 사상은 안유와 정몽주, 길재, 김굉필로 이어지는 정주학의 영향을 받았을 것임은 물론인 동시에 용인의 유림계에 학문적·사상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였던 도암 이재는 전형적인 주자학의 유자로서 성리학과 예설에 심오한 조예가 있었던 실천적 학자였다. 그가 저술한 『사례편람(四禮便覽)』은 이론적 근거가 명철하고 치밀하며 예학으로서 유교의 체계를 확립하여,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 등 상류층 가정에 거의 집집마다 배포되어 예전으로 활용되기에 이를 정도였다. 또 책의 내용이나 삽입된 도해(圖解) 등은 우리나라 중세 민속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은 저술은 성리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학문적으로는 이이와 조광조의 학문적 사상을 이어받은 것으로, 이로써 이재에 이르러 유교적 사상을 근거로 한 예학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예학의 완성에 따라 유교의 영향은 사서인에 이르기까지 유교를 숭상하여 그 문화가 뿌리내리게 하였으며, 조선의 정신으로 자리잡아 동방예의지국의 근간이 되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