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723 |
---|---|
한자 | 忠節-表象鄭夢周-圃隱文化祭 |
영어음역 | Chungjeorui Pyosang Jeong Mongjuwa Poeun Munhwaje |
영어의미역 | Symbol of Fidelity, Jeong Mongju and Poeun Cultural Festival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홍순석 |
[모친의 태몽으로 이름을 짓다]
충절의 상징이요, 성리학의 조종으로 추앙되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출생지는 경상북도 영천군 동우항리이다. 포은 선생의 어머니는 영천이씨인데, 임신 중에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려 깜짝 놀란 꿈을 꾸고 나서 낳은 아이라고 하여 처음에는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하였다.
포은 선생이 아홉 살 되던 어느 날이었다. 영천이씨가 낮잠을 자다가 검은 용이 뜰 가운데 있는 배나무에 기어오르는 꿈을 꾸고 놀라서 깨어 보니 포은 선생이 배나무를 기어오르며 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름을 다시 몽룡(夢龍)이라 고쳤는데, 널리 알려진 몽주(夢周)는 관례를 행하고 나서 바꾼 이름이다.
[동방 성리학의 조종]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났던 포은 선생은 일찍이 문과에 세 번이나 잇달아 장원하여 명성을 떨쳤다. 성균관 박사로 있으면서 강론을 맡았을 때에는 자신이 연구한 독자적인 학설을 가르쳤다. 당시에는 아직 우리나라에 성리학의 체계가 서기 전이어서 쉽게 이해하는 학사들이 적었으나, 점차 성리학을 이해하게 되면서부터는 포은 선생의 학설에 감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색(李穡) 같은 사람은, “포은의 학설은 횡설수설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면서, ‘동방 성리학의 조종’으로 추대하기까지 이른다.
포은 선생은 또한 외교가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교린의 정책으로 왜국과의 교섭이 불가피하였을 때는 위험을 무릅쓰고 왜국으로 건너가 뛰어난 시문으로 고려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왜인들의 칭송을 받았다. 또한 귀국하면서는 당시 포로로 끌려가 있던 고려인들까지도 함께 데리고 올 정도로 외교술이 뛰어났다.
우왕이 즉위할 때 명나라 사신 채빈이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도 포은 선생이었다. 명나라 황제는 포은 선생의 성실한 태도에 감복하여 각별히 우대하였으며, 그 뒤로 고려는 명나라와 다시 국교를 열게 되었다.
포은 선생은 또한 당시까지도 유행하던 몽고풍의 제도와 풍습을 고쳐 명나라의 제도에 맞추게 하였으며, 사전 혁파를 주청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케 하였다. 교육에도 남달리 힘써서 개성의 오부에는 학당을,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을 진흥케 하였다. 불교의식을 따르던 관혼상제의 제도를 주자가례에 따라 실시하도록 주청하고 관례를 세운 사람 역시 포은 선생이었다.
[포은 선생의 넋이 점지한 능원리 묘역]
포은 선생은 기울어 가는 고려왕조를 회생시키려 동분서주하다가 개성의 선죽교에서 희생당한다. 그의 나이 56세 때였다. 그러나 순절한 지 9년 후에 충절과 학문을 인정받아, 태종이 즉위한 1401년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와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의 작훈을 받게 된다. 그리고 1406년(태종 6) 3월에는 개성의 풍덕에 초장하였던 묘소를 지금의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문수산 기슭으로 옮기고 부인 경주이씨와 합장하였다.
그런데 본래 포은 선생의 면례지는 능원리가 아니었다고 한다. 용인 지역에서 전해 오는 전설에 따르면, 포은 선생은 선죽교에서 피살된 직후 개성의 풍덕에서 장례를 지냈다가 신원이 되자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으로 천장이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영천으로 가기 위한 면례 행렬이 지금의 수지구 풍덕천동에 이르렀을 때, 앞에 내세웠던 명정이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이상하게 여긴 면례꾼들이 따라가 보니 명정이 지금의 묘역에 떨어져 있었다. 지관을 불러 확인해 보니 보기 드문 명당이었다. 그리하여 집안사람들은 모든 일을 포은 선생의 뜻으로 알고 그곳에 장례를 모시기로 하였다. 그야말로 포은 선생의 넋이 점지한 명당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후 후손들이 묘막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능원리는 영일정씨의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포은 선생의 묘소와 관련된 지명으로 수지구에 풍덕내가 있다. 본래 “풍덕에서 오신다[豊德來]”는 뜻에서 비롯하였으나, ‘오신다’의 뜻인 ‘래(來)’가 후대에 이르러 ‘내[川]’로 변이된 것인데도 지금 사람들은 그 유래도 모르고 풍덕천이라고 부른다.
포은 선생의 묘소는 1972년에 경기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묘역의 민가 세 채를 이전하고, 신도비각과 재실 등을 손보는 등 주변 지역을 크게 정화하였다. 묘소의 곡담은 본래 벽돌로 쌓았던 것인데, 수백 년간 보수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것은 거의 소실되고 곡담 양끝에 몇 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신도비도 조선조의 벼슬은 마다하다]
현재 포은 선생의 묘역에는 묘표와 신도비가 전한다. 묘표는 1517년(중종 12)에 태학생들이 포은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중종(中宗)에게 상소하여 세운 것이다. 조선조에 비석을 세웠음에도 전면에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하여 굳이 벼슬을 고려 때 것으로 쓰고 조선조에 추증된 문충공(文忠公)은 쓰지 않았는데, 이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겠다는 포은 선생의 본뜻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포은 신도비는 1699년(숙종 25)에 세운 것으로,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글을 현종 때의 문신 김수증(金壽增)이 쓰고, 전액은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처음 이 신도비를 세울 때 조선조에서 추증한 문형(文衡)의 직함을 새겨 비를 세웠더니 벼락이 떨어져 파괴되었다. 그후 다시 고려조의 직함을 새겨 세웠더니 지금까지 아무런 변고 없이 전한다고 한다.
[모현읍에 전하는 포은의 유적들]
모현이란 행정 명칭은 1413년(태종 13)의 행정구역 개편 때 ‘용인(龍仁)’이란 명칭이 생겼을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지금까지 거의 6백여 년이나 존속해 온 셈이다. 모현읍은 원래 ‘쇄포촌(灑布村)’으로 불리던 곳이다. 모현면 연혁지에도 “본래는 쇄포면(灑布面)이라 하였던 것을 조선 태종 때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유해를 능원리에 천장한 이후부터 ‘충신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모현(慕賢)’으로 개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용인시 관내의 많은 읍·면들이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두 개의 면이나 네 개의 면을 합쳐 하나의 면을 이룬 반면, 모현읍[당시 모현면]은 행정구역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이어져 왔는데, 이는 포은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한 배려가 작용한 것이 분명하다.
용인 지역에서 포은 선생의 얼을 기리게 된 것은 능원리에 묘소를 안장한 이후부터이다. 후손들이 모현읍 능원리에 묘막을 짓고 거주한 이래 능원리 일대는 영일정씨의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묘소 부근의 묘막은 지금의 재실인 ‘영모재(永慕齋)’로 바뀌었다. 또한 능원리 내곡동에는 포은 선생 종가와 가묘인 포은영당(圃隱影堂)이 있다.
포은영당은 1679년(숙종 5)에 민정중(閔鼎重)의 청원으로 임금이 필요한 건축자재를 직접 하사하여 지은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영당 안에는 영정잠실·위패·영정 세 점과 포은이 생전에 왕래한 서간과 친필이 수록된 『고간집(古簡集)』은 물론이고 숙종의 어제 어필로 된 추모시첩도 보관되어 있다. 아울러 숙종의 추모시는 세 장의 목판에 판각하여 현판으로 걸어놓았다.
종가 가까이에는 포은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충렬서원(忠烈書院)이 있다. 충렬서원은 1576년(선조9)에 건립되고, 4년 뒤에 사액되었다. 지금도 서원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내외삼문을 비롯하여 강당과 사우 등 서원의 필수적인 시설을 모두 갖추고 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바 있으나, 그 부당함이 인정되어 곧바로 복원되었다. 충렬서원은 포은 선생을 주벽으로, 포은 선생의 손자인 설곡 정보(鄭保)와 죽창 이시직(李時稷)의 향사를 모시는 한편 교육기관으로서도 충분히 일익을 담당하였는데, 용인의 대학자 도암 이재가 여러 유림과 학문을 교류하던 곳이기도 하다.
[용인 지역에 끼친 포은 선생의 영향]
전통시대에는 명현(名賢)들의 연고지를 중심으로 마을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한 마을에 명현의 묘역이 이루어지면 자손들의 시묘(侍墓)와 함께 자연스럽게 근접 지역에 생활 터전이 형성된다. 또는 명현들이 치사(致仕)하여 전원생활을 즐기거나 은둔하기 위해 한 지역에 처음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모현읍의 경우 포은 선생의 묘소를 모현읍 능원리로 옮기면서 모현읍 일대에 영일정씨가 자리하게 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마을 이름인 ‘능원리(陵院里)’도 여기에 연유한다. 그러나 포은 선생과 용인의 관계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포은 선생이 용인 지역에서 영면한 이후 전국의 유림들이 이곳에 와서 숭배하였고, 충렬서원이 건립된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포은 선생의 학풍을 진작하려는 노력이 기울여졌다.
용인 지역에서의 포은 선생의 위상은 다른 인물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다. 지금 우리 시대에서는 그 위상이 감해 가는 실정이지만,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바라보는 용인 지역, 특히 모현은 유학(儒學)의 성지(聖地)나 다름없었다. 동방 성리학의 조종으로 추숭되는 포은 선생의 묘역이 모현읍 능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용인 지역에 대해 관심을 가질 만했고, 그에 따른 지역의 변화는 자연스런 결과였다.
이재의 지적대로 포은 선생의 묘역과 영모재, 포은영당, 그리고 충렬서원이 용인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긍지를 가질 만했고, 그러한 자긍심에서 용인 지역 유림들은 포은 선생의 학통을 계승하고자 분발하였음이 분명하다.
『충렬서원선생안(忠烈書院先生案)』에 등재된 이정구(李廷龜), 민정중(閔鼎重), 정제두(鄭濟斗), 이재, 이행상(李行祥) 등이 우리 역사에서 명망을 떨쳤던 경대부(京大夫)요, 거유(巨儒)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노론계를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의 형성은 바로 충렬서원을 거점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용인의 대표적인 축제 포은문화제]
포은문화제는 2003년도에 문화관광부에서 6월의 문화인물로 포은 선생을 선정한 것을 계기로 마련된 축제이다. 포은문화제의 취지에서 말하고 있듯이, 포은문화제를 계기로 용인이 ‘동방 성리학의 성지’로 재인식되길 기대하며 포은 선생의 위업을 재조명하는 행사인데, 용인문화원이 주관하여 매년 5월이나 6월 중에 열리고 있다. 주요 행사인 포은선생천장례행렬(圃隱先生遷葬行列) 재현이나 추모제례(追慕祭禮)는 용인이 동방의 예학(禮學)을 대표하는 지역임을 보여준다. 포은문화제의 대표적인 행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포은선생천장행렬
천장행렬은 포은 선생의 묘역을 개성의 풍덕에서 지금의 위치인 모현읍 능원리로 천장하는 과정을 재현한 행사이다. 예부터 죽음에 대한 의식은 관혼상제의 사례(四禮) 가운데 가장 엄숙하고 정결하게 받들어졌다. 장례가 사자(死者)를 지하로 모시는 일이라면 천장(遷葬)은 묘를 옮기는 절차이다.
천장행렬은 맨 앞의 경찰차를 선두로 뒤의 만장 행렬과 풍물패까지 여러 가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취타대나 기수단은 현대적인 구성이고, 전통적인 구성을 말한다면 개(蓋), 우산(雨傘), 방상씨, 불삽, 운삽, 영여(靈輿), 상두꾼, 상여(喪輿), 상주(喪主), 만장(輓章) 정도를 들 수 있다.
천장행렬은 풍덕천동에서 출발하여 수지구청까지, 능원초등학교에서 묘역까지로 구간을 정하여 3백여 명의 구성원이 동원된다. 선두에 취타대가 서고, 이어서 현수막-기수단-영기집례영기-포도대장-당상관 2명-당하관 2명-방상씨-개-우산-방상씨-불삽-운삽-영여-공포-명정-상두꾼-상여-상주-불삽-운삽-만장-풍물패의 순서로 이동한다.
천장행렬은 상여의 규모나 상두꾼의 선소리가 주목을 끈다. 상여는 24명이 메는 대틀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8명이 메는 소틀을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큰 규모이다. 장식도 규모에 준하여 화려하게 꾸몄다. 천장행렬 전날 미리 조립해서 천장용구전시회를 개최하는데, 전통문화 학습 차원에서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상여를 이끄는 선소리꾼이나 상두꾼은 매년 다른 인원으로 구성된다. 전날 상여놀이대회에서 우승한 팀이 천장행렬의 상여를 이끌거나 전문적인 상여꾼을 초빙해서 이끌게 하기도 한다. 중심 시가지를 행렬하는 행사이기 때문에 많은 시민이 구경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는 데 반해 교통 체증의 원인으로 비난을 사기도 한다.
2. 추모제례
추모제례는 『포은집(圃隱集)』의 문헌 근거와 예전(禮典)에 의거하여, 조정에서 예관을 파견하여 치제(致祭)하는 제례로 구성하였다. 포은 선생의 묘역에서 성균관과 정제연구회 등의 주관으로 이루어진다. 추모제례는 행사 전일과 당일에 실시하는 의례로 구별된다. 전일 행사로는 포은종약원에서 주관하는 고유제(告由祭)가 있고, 행사 당일에는 치제(致祭)를 재현한다.
당일의 추모제례는 영신례(迎神禮), 전폐례(奠幣禮), 초헌례(初獻禮),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 음복례(飮福禮), 철변두(撤籩荳), 송신례(送神禮), 망료례(望燎禮)의 순서로 진행한다. 헌관은 당일 참석한 기관장이나 후손, 유지들 중에서 분임하는데, 초헌관과 아헌관, 종헌관, 분헌관 순으로 이어진다. 제례악(祭禮樂)과 일무(佾舞) 등 취주악이 연주되며, 당상관의 예우에 준하여 사일무(四佾舞)로 구성되어 있다.
추모제례는 3백여 명의 후손과 일반 참배객이 참례한 가운데 한 시간 동안 엄숙하고 장엄하게 진행된다. 전통문화 보존 차원에서 종묘제례를 관장하고 있는 이형렬 씨가 직접 진행하는 행사로, 전국 각지에 거주하고 있는 포은 선생의 후손들이 전통 복식을 입고 참여하여 함께 제례를 올리는 광경이 장관이다.
상산제는 원래 나라를 위하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충신을 모시는 굿을 말한다. 포은상산제는 포은 선생을 최고의 상신으로 모시는 굿으로, 할미성대동굿보존회에서 두 시간 정도 실연한다.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부정 물림 및 가망 청배: 주위의 부정을 물리고, 금일 모셔야 할 신령을 청배한다.
2) 승전거리·장군 물림: 옥황상제와 삼부인, 관운장, 단군할아버지 등 높은 신령을 청배하여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통일을 기원한다.
3) 초영실: 금일 모시고자 하는 망제님을 모시고 넋두리를 하며, 생시와 같이 연전되어 만신의 몸을 빌려 자손과 대화하고 원한을 풀어나간다.
4) 사자삼성: 망자를 모시고 왔다가 가는 삼사제를 대우하고, 못다 한 망제의 사연을 사자를 통해 들으며, 사자재담으로 울고불고하며 굳어졌던 마음이나 엄숙함을 해학적으로 풀어나간다.
5) 말미·길닦음: 칠공주 말미(바리공주)를 청배하여 축원하며 왕생 극락을 발원하고, 후영실과 함께 길닦음을 한다. 길닦음은 소창과 삼베를 가르며 나가면서 저승 가는 길을 열어준다는 의미를 지닌 굿의 한 과정이다.
상산제는 추모제례 이후에 공연물의 성격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용인 지역의 대동굿을 보존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그러나 일부 개신교도들이 매번 행사를 방해하여 상산제의 규모가 축소되고 있는 실정이다.
4. 전국한시백일장
포은 선생의 학문을 기리고 충효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개최하는 행사로서, 전국에서 향교 단위와 유림, 한시동호회 회원들이 단체로 참가한다. 전통 복식인 유건을 쓰고 도포를 입은 참가자들이 칠언율시의 한시를 짓고 있는 모습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유생들이 과거시험을 보는 듯하다.
시제(詩題)는 포은 선생과 관련한 범주 내에서 출제하며, 시의 형식은 칠언율시이다. 전국한시백일장에서 장원한 응시생에게는 많은 시상금을 수여하는데, 수상자는 어사화를 갖춘 전통 복식을 입고 수상한다. 장원한 응시생의 시는 행사장 주변에 방(枋)으로 붙여 둔다.
5. 기타 행사
포은문화제는 삼 일간 진행되는데, 주요 행사 외에 여러 가지 부대 행사가 매년 다르게 구성된다. 전야제는 외부 공연자들의 초청 공연으로 이루어진다. 학술행사로 포은문화제 전국학술대회를 2회, 전국사진촬영대회를 1회 개최하였으나 근래에는 편성되지 않았다. 대신에 청소년층의 축제 참가와 관심을 유발하기 위하여 학생글짓기대회와 청소년국악경연대회 등이 부대 행사로 진행되었다.
학생글짓기대회는 용인시 관내 초중등학교에서 추천된 학생들이 행사 당일 참여해서 작문하여 제출하고, 이를 심사해서 시상한다. 청소년국악대회는 성악과 기악 부분으로 편성하여 응모하는데, 참가자들이 많아 예심을 치르기도 한다. 참가 학생들에게 꿈을 키우고 독려하는 계기도 되고 있는 청소년국악대회는 심사시간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국악인 초청공연만으로도 관객 유치에 성공한 경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