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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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家 |
영어음역 | Dongnibundongga |
영어의미역 | Independence Fighter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구완회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제천 출신이거나 제천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구한말 항일 의병의 본거지였던 제천 지역은 다양한 형태의 항일 독립운동이 전개됨으로써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고 국권 회복의 날을 앞당기는 데 기여했다. 국권 상실 직후에는 의병론자들이 개화론자들과 연대하면서 독립운동을 시작했으나 일제의 강력한 탄압에 눌려 복벽(復辟)운동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이후 1919년 3·1 운동을 겪으면서 명실상부한 근대 민족 국가를 지향하는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으며 그 무대도 국외로 확대되었다. 이와 더불어 제천 지역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이 전개되었으며, 국내는 물론 국외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제천 출신 인물들도 등장하였다.
[3·1 운동과 독립운동가]
독립운동은 3·1 운동 이후에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제천 지역에서는 이범우(李範雨)나 장용근(張龍根)이 부명학교[제천공립보통학교의 전신]의 후배들을 동원했던 바와 같이 신교육을 통해 형성된 사회 세력이 항일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 과정에서 이맹삼(李孟三), 이화춘(李化春), 이윤용(李允容), 박성일(朴聖日) 등이 사망했고, 이범우, 이기하(李起夏), 권종필(權鍾弼), 전필현(全弼鉉), 장용근(張用根), 이선동(李先童), 이기택(李起澤), 최종률(崔鍾律) 등이 실형을 받았다.
서울에서 만세 운동에 가담했던 권희목(權熙穆)도 옥고를 치렀으며 김진목(金鎭睦)은 만세 운동 후에 상하이의 임시 정부를 찾은 이래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 그밖에 권명상(權命相)·이주면(李柱冕) 등도 임시 정부와 직간접의 관계를 가지면서 활동하였다.
[국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3·1 운동 이후에는 사회 운동을 통해 일제가 구축해 놓은 질서에 도전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대표적인 것이 청년회를 통한 활동이었다. 제천청년회는 처음에 유지들이 주도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제천소년회 운동, 제천공립보통학교 동맹 휴학[1926], 3·1 운동 등에 참여했던 젊은 활동가들이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김정호(金正浩), 박육경(朴六慶), 김학근(金學根), 조명구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강하였다.
이들은 다른 지역에서 전개되던 ‘조선청년총동맹’, ‘신간회’ 운동 등의 사회 운동과 연대하면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박육경[후에는 박설송으로 이름을 바꿈]은 화성단(火星團)이라는 연극 단체를 만들어 전국을 순회하면서 경향성이 짙은 연극을 공연하여 항일 의식과 계급의식을 고취시켰다. 소작 농민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제천농민조합’ 운동을 주도한 것도 이들 세대가 중심이 되었다. 일제는 이들 단체를 불온 단체로 간주하고 면밀히 감시하고 탄압하였다.
[국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국외로 망명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일찍이 의병에 뛰어들었던 채찬(蔡燦)이나 이명하(李命夏)를 들 수 있다. 채찬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서 서로군정서, 통의부 등에서 활약했고, 이명하는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여 무장 투쟁을 벌였던 인물이다.
그 외에 백두산 일대의 만주 지역을 무대로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한 신응규(申應奎), 무정부주의 운동 계열인 남화한인청년연맹 등에서 활약한 이용준(李容俊),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여 광복군에서 활동한 이성구(李晟九), 임시 정부와 신민부에서 활동했던 황학수(黃鶴秀) 등도 있었다. 황학수는 후에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자 시안[西安]에서 총사령 대리로서 활약하였다.
[의의와 평가]
항일 의병의 중심지였던 제천에서 다양한 독립운동의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제천의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가 아직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2010년까지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14명에 불과하다.